10월항쟁 76주기 위령제···“대구시, 진실규명·희생자 기억 활동 소극적”

“대구시, 진실규명과 희생자 기억 활동에 소극적”
진실화해위원회 신청 기한 올해 12월 9일까지
“역사관 마련해 역사 기억하려면 지자체, 시민사회 역할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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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28)’에서 ‘10월항쟁 76주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72주기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당초에 대구시 주최로 2020년 건립 이후 코로나19로 진행 못했던 위령탑 제막식은 유족들이 위령비에 희생자 이름을 추가로 새겼다는 이유로 열리지 못했다.

76주기 10월항쟁 및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72주기 위령제 열려

▲1일 오전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28)’에서 ‘10월항쟁 76주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72주기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에는 10월항쟁유족회원과 전국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을 포함해 200여 명이 참석했다.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참석했고, 강민구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 위원장, 한민정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 황순규 진보당 대구시당 위원장 등 정당 인사들도 참석했다.

채영희 대구10월항쟁유족회장은 “10월항쟁이 유족들의 문제를 넘어 대구와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며 “그러려면 진실규명을 통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유해 발굴 및 추모공원 조성, 사실에 근거한 역사교과서 기술, 미신고자 기한 없는 창구 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영희 회장은 “대구시가 희생자 구술채록사업도 신청하지 않고, 위령비에 추가 희생자 이름을 새겼다는 이유로 제막식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유족들도 나이 들어가고 있는데 늦기 전에 대구시가 진실규명과 시민들이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사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왼쪽 아래편에 희생자 15명의 이름을 추가로 새겼고, 대구시가 원상복구를 요구했다. 유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구시 주최의 위령탑 제막식도 열리지 않게 됐다.

대구시는 2020년 11월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위령탑을 건립했다. 위령비에는 유족이 확인한 희생자 명단 573명이 새겨졌다. 이후 10월항쟁유족회는 추가로 확인한 희생자 15명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자 대구시는 추가 각인은 안 된다며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내렸고, 유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합동위령제와 함께 준비하던 제막식을 열지 않기로 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보낸 추도사는 권오상 대구시 행정국장이 대독했다.

이 자리에 직접 참석한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은 “지금까지 대구경북에서 진실규명을 위원회에 신청한 분이 159명에 이르고 있다. 7월 5일 경주 보도연맹사건 29명, 9월 6일 고령 보도연맹사건 34명, 9월 20일 경산 보도연맹사건 12명에 대한 진실규명을 했다”며 “가창골 용계리 유해발굴 작업 등 다른 신청사건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진실규명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1일 오전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28)’에서 ‘10월항쟁 76주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72주기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대구시, 진실규명과 희생자 기억 활동에 소극적”
진실화해위원회 신청 기한 올해 12월 9일까지
“역사관 마련해 역사 기억하려면 지자체, 시민사회 역할 중요”

유족들조차 대부분 70대를 넘긴 고령이라 10월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기록은 시간 싸움이 됐다. 게다가 2기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기한도 올해 12월 9일로 정해져 있다. 10월항쟁유족회를 통해 신청한 유족도 80명에 이른다. 2005년 출범한 1기 진실화해위원회를 알지 못했거나,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던 형이 졸업을 앞두고 김천소년형무소에 끌려간 이후 소식을 듣지 못한 이일영(74) 씨도 이번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1기 때는 진실규명 신청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2014년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고, 이번에 2기가 출범하면서 신청했다”며 “조사를 다 마쳤는데 정부가 바뀌고 나서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일제에 징용까지 끌려갔다가 6.25전쟁 직후에 끌려간 큰아버지 조용해 씨를 둔 조희제(63) 씨도 이번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조 씨는 “할머니한테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하자마자 잡혀가서 자녀도 없고, 제사를 지내왔던 제가 진실규명을 신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기한도 걱정이지만, 대구시 행정도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 4월 대구시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증언 채록’ 사업도 신청하지 않으면서 유족과 관계가 소홀해졌다. 대구시는 담당 부서의 업무 부담으로 신청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대구시에 따로 안내까지 했던터라 아쉬움을 남겼다. (관련 기사=대구시, 진실화해위 ‘민간인 희생 구술’ 공동사업 빠져(‘22.4.5))

반면에 경북 경산시는 이 사업을 신청했고, 대구의 희생자 증언 채록도 경산시가 일부 맡고 있다. 희생자 증언 채록 과정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이면서 연좌제 피해를 겪은 당사자도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10월항쟁> 단행본을 쓴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항쟁의 중심지였던 중부경찰서와 대구역 부근에 역사관을 마련하고 표지석이라도 세워 그 역사를 후세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고령인 유족들께서 돌아가시면 그 사업을 이어받을 주체가 없다. 지자체와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10월항쟁은?

10월항쟁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다. 1946년 9월 24일 대구에서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총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9월 30일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 400여 명이 쌀을 요구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10월 1일 경찰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식량 정책과 친일 경찰 중용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

2일부터는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계엄령 선포로 맞섰다. 13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60여 명이 다쳤다. 수천 명이 ‘폭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됐다. 대구의 봉기는 이후 경북 지역을 시작으로 남한 전역으로 번져 그해 12월까지 시위가 지속됐다.

10월항쟁 참가자들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적법절차 없이 처형됐다. 경찰의 집단 처형 인원은 1,438명으로 추산된다. 좌익에 있다가 전향한 사람을 가입시켜 정부가 만든 국민보도연맹원을 적법절차 없이 처형한 사건도 벌어졌다.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4,934명, 대구는 99명이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최소한 10만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유족이 함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경북·대구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과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 후 일어난 5.16 군사반란으로 유족들이 구속되면서 유족회는 강제해산됐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10월항쟁을 폭동이 아닌 항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왔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정으로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10월 대구사건과 대구보도연맹 관련 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진상규명 결과를 결정했고, 10월항쟁유족회가 결성됐다. 유족회는 이때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온 가창골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때마침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인정한 뒤 정부 쪽에 사과와 위령 사업 지원을 권고하면서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대구시의회도 2016년 7월 26일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대구시도 예산 8억5천 원을 들여 2018년부터 위령탑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