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상인(商人)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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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루오라는 성(性)만 공개된 대만 여성이 전례 없는 소송을 냈다. 루오는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웠고, 두 명 모두 치과대학까지 보냈다. 그 급부로 그녀는 자신의 노후에 아들들이 자신을 부양하길 바랐다. 그런데 한 아들이 기대를 저버리자, 그녀는 그 아들을 고소했다. 그녀가 그를 키우며 투자한 시간과 돈을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타이완 대법원은 루오의 손을 들어주며, 아들에게 96만 7,000달러의 양육 비용을 모친에게 지불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례는 유교 윤리의 기본인 오륜(五倫) 가운데서도 첫 번째인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인륜(부자유친)을 훼손한 것처럼 보이고, 자식에게 사랑(돌봄)의 대가를 바랐던 그녀의 행동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서양이나 자본주의적인 사고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리-시앙 리사 로즌리는 유교페미니즘을 구축하려는 목적에서 『유교와 여성』(필로소픽,2023)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다. 유교와 페미니즘은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대적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는 터에, 지은이는 유교는 반여성적이지 않으며 유교 안에는 페미니즘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대신 지진이 일어날 만큼 인상적이었던 한 문장을 소개한다. “한 마디로 유교에서는 조건 없이 받을 자격이란 없다.” 오륜에 이 말을 적용해 보면, 부모 자식 간에, 임금과 신하 간에, 남편과 아내 간에, 어른과 어린이 간에, 친구와 친구 간에 하늘이 맺어진 끈이나 믿음만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유교에는 서양의 인권에서 말하는 “절대적 평등” 따위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울 수 있을 뿐, 아들이 아버지답거나 신하가 임금다울 수는 없으므로 ‘다움’과 ‘다움’ 사이엔 평등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을 대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다움’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따로 되거나 쌀 톨처럼 흩어져 있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유교의 ‘다움’은 서양에서 말하는 ‘나 다움’처럼 홀로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호혜성(相互互惠性)으로 얽혀있다. 서로 기브 앤 테니크(Give and Take) 한다는 뜻이다.

오륜의 첫 번째인 부자유친에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상호호혜성이 암묵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유교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부모의 내리사랑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 불효란 무엇인가. 부모는 자식에게 베풀었는데, 다 자란 자식이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는 그것을 가리켜 불효라고 한다. 이처럼 효/불효는 기브 앤 테이크로 작동한다. 유교권의 맏아들이 부모를 모실 의무와 권리를 독차지했던 것도 그가 다른 자식보다 부모의 사랑을 더 받았던 데다가 땅뙈기를 저 혼자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맹자는 사단(四端)의 첫 번째인 측은지심을 설명하면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는 무조건 구하려는 것이 인(仁)이라고 했고, 예수는「누가복음」 10장 30~35절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며 이웃은 동족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 이야기에 후일담은 없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보은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했던 사람은 아이가 다 자라고 나서 자신에게 보은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이가 그럴 능력이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을 동양에서는 배은망덕이라고 한다.

『유교와 여성』에 강조되어 있듯이 서양에는 초월적인 신이 있지만, 유교는 신 없이 출발했다. 신이 없는 유교는 그 대신 인간끼리의 상호호혜성을 중시했고, 그것을 예(禮)라는 윤리적 법칙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차이로 인해 서양-기독교 문명은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라는 기이한 개념을 물려받게 되었고 유교는 현실주의를 발전시켰다. 신을 믿는 사람은 가난한 거지에게 무조건적인 적선을 하면서 거지는 할 방법이 없는 기브 앤 테이크를 신에게 기대할 수 있지만, 신이 없는 유교는 그렇지 못하다. “조건 없이 받을 자격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