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집 없는 모든 이가 불안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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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전세사기 취재를 하는 내내 불안했다. 피해자 인터뷰나 기자회견 취재를 하고 자취방에 도착하면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등기부등본을 뗐다. 인터넷등기소를 클릭하는 손에 땀이 나서 바지에 닦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월세 내는 게 아까워서 전세방을 선택한, ‘설마’하며 보증보험을 들지 않은 나를 탓했다. 800원 내고 뗀 등기부등본을 위안 삼아 잠든 날은 꼭 잠자리가 불편했다.

내가 이 집을 택한 건 해가 잘 들어서, 밤에 다녀도 안전할 만큼 대로변에 있어서, 입구의 보안이 철저해 보여서, 무엇보다 다음 단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다들 먼저 그 집을 택한 이유를 풀어냈다. 그리곤 다음에 대한 계획을 말했다. 아이가 태어났거나 청약에 당첨됐거나 취업을 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 계획은 여지없이 나의 꿈이기도 했다.

올해 초부터 대구 전세사기 이슈를 취재하면서 ‘개인이 아닌 구조의 탓’이라는 이야기를 수백 번 듣고 썼다. 하지만 정작 나부터도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역전세 등 불안한 조짐이 생기자, 원인을 나에게 돌렸다. 전세사기의 진짜 문제는 아직 피해가 닥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세입자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데 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가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을, 이젠 집을 갖지 못한 모두가 공유하는 시대가 됐다.

바뀌어야 할 건 우리가 아닌 법과 제도인데 온라인에는 ‘전세사기 피하는 팁’ 같은 글과 영상이 쌓인다. 물론 그 방법을 모두 지켜도 전세사기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우린 안다. 전세사기를 당한 뒤 국가가 보호해 주지 않을 것도 안다. 대구 북구 침산동 신탁사기 피해자인 정태운 씨는 “전세사기 특별법 내용은 결국 무이자로 추가 대출을 받거나 경‧공매 등의 문제를 유예시키는 것 뿐 아니냐. 피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빨리 전세금을 돌려받는 것”이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운이 좋아야 피해 간다’거나, ‘누군가를 내 자리에 밀어 넣어야 빠져 나간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팽배한데 국회는 요지부동이다. ‘선 구제 후 회수’를 포함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제자리걸음 중이다. 집에 담은 꿈이 좌절되는 것, 저출생이니 경제성장이니 중요하다고 떠드는 모든 문제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테다. 모두가 집을 가질 수 없다면, 집이 없는 이들도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정부와 국회가 만들어야 한다.

‘신년을 앞두고 전국의 1만여 명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특별법 개정안 통과라는 선물이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음 집을 월세로 알아보고 있다. 물론 지금 집의 전세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는, 당하더라도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모를까. 더는 불안함을 안고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다. 집에서 다음 단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 오롯이 개인에 책임을 지우는 지금의 시스템 속에선 잘 모르겠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