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5) 풍뎅이

18:12

풍뎅이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의 테두리 속에 끼여 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 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
너의 사랑

글에서 인용한 ‘풍뎅이’는 <김수영 전집 1(시)>에서 인용했습니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우는 존재는 ‘풍뎅이’가 아니다. 이 시에서는 “너”로 지칭되는 존재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없고 다만 그 존재가 우는 사건, 그리고 그 울음을 노래로 받아들이는 시적 화자의 태도만이 드러나 있다. 김수영에게는 시가 발생된 상황을 생략해버려 읽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작품들이 많다. 김수영 시의 난해성은 일차적으로 여기서 시작된다. 시가 발생하는 지점에 대한 사실적 진술의 거부에서 말이다.

이 시의 1행인 “너의 앞에서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다”는 어떤 체념으로도 읽히고 어떤 사랑의 양태로도 읽힌다. 사랑은 견고한 자기가 지워지고 불현듯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전적으로 개방되는 상태가 되기도 하는 순간을 갖는다. 이렇게 짧게나마 ‘나’가 사라지는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알고 있고 누구든 얼마간 경험하기도 한다.

“백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 꼭 사랑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시적 화자에게는 다른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지”는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 다시 말하면 삶의 지난한 과정(“소금 같은 이 세계”의 “존속”) 속에서 “너와 나와의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왜 “너와 나의 관계”는 한쪽이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다른 한쪽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아는지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거대한 삶의 소용돌이에서 맺어지고 갈라지는 “관계”가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지 시적 화자에게는 심각한 화두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은 “이 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그치지 않을 것만 같으며, 또한 그것에 굴하지 않고 “이 세계가 존속”하는 동안 그 질문을 그치지 않겠다고 (“의심할 것인데”) 말한다. “이 세계가” “소금 같은”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적 화자의 “의지”일 뿐, 눈앞에 벌어진 현실은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울음’이 ‘나’에게는 “노래”로 들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노래”는 기쁨이나 찬양의 노래가 아니다. 이 “노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다.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는 말은, 지금 불러지는 노래의 역사성은 부르는 자보다 듣는 자가 훨씬 더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에도 부합되지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그 울음-노래가 구체적으로 “추한 나의 발밑”에서 터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또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아는 공명에서 알 수 있듯이, “너”와 ‘나’는 이미 공통된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일단은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하늘을 보고” 울면서 일으키는 “너”의 “거대한 여울”이 “나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의지”는 “미끄러져가”고 “너의 노래”는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것이다. 시적 화자는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살겠다는 “의지”를 다짐하나, “너”는 이미 “거대한 여울”을 일으키고 “의지보다 더 빠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너의 노래보다 더한층 신축성이 있는/너의 사랑”이다. 즉 울음-노래를 가능케 한 힘은 “너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 “너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시에서 “우둔한 얼굴”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공명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위장에 가까운데, “노래가 어디서 오는”지 서로 알고 있기에, 그러나 그 “어디”가 긍정적인 계기 혹은 시간이 아니기에, 서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무의식이 위장을 감행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이게 위장이라면 그것은 그 “어디”를 부정하고픈 심리상태에 기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살 것이다. 설령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한다 하더라도. 여기서 “너의 사랑”은 ‘나’를 향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적 화자의 이성적 “의지”마저 “미끄러져가”게 하는 “너의 사랑”은 무엇인 걸까.

“어느 아침, 작은 소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막 밥을 한술 뜨려던 참이었다. 그때 불쑥 문이 열렸다. 수영이었다. 수영은 집 안을 한번 훑어보더니 이종구에게 말했다. ”자네가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 낮으면서도 묵직한 음성이었다. 이윽고 수영은 나를 돌아보더니 ”가자.“ 하고 짧게 말했다. 나는 그런 수영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곧 따라가겠다고 돌려보냈다. 그날 돌아가던 수영의 뒷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것은 슬프고 처량하기보다는 당당하고 결연한 모습이었다.”(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이 구절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친구인 이종구와 살림을 차리고 있던 아내 김현경에게 처음 나타난 장면이다. 김현경의 일방적인 짧은 증언임을 감안하더라도 김수영이 그 비참한 상황에서 보여준 태도는 김수영의 내면에 대해 얼마간의 힌트를 준다. 이 시가 1953에 써진 점을 봤을 때, 여기서 “너”와 아내 김현경이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시에서 표현된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는 장면은 김현경의 증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김수영이 겪어야 했던 모욕은 십분 헤아려지고도 남는다. 그 뒤로 김현경은 이혼 문제로 김수영을 다시 만났다고 증언하는데, 아무튼 이 시에서 나타난 “너의 사랑”은 여러 가지 해석과 울림을 준다. 왜냐면 “너”의 울음이 노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즉 “늬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이 시에서 “너의 사랑”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해석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둔한 얼굴”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것, 그리고 “너”의 울음을 노래로 받아들이는 것, 그 울음의 역사성을 냉철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울음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아득해지는 것 등 이 모두가 “너의 사랑”이 일으킨 “거대한 여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적 화자가 말하는 “너의 사랑”은 곧 ‘나의 사랑’은 아니었을까? ‘나의 사랑’을 “너의 사랑”으로 뒤바꾸는 위장은 그만큼 ‘나의 사랑’이 깊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사랑은 합리적 이성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때 나타나는 반합리는 현실에게는 어떤 혼돈을 주지만 시에서는 창조의 틈이 되기도 한다.

사랑과 혁명과 시는 이렇게 피의 색깔이 같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