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6) 진정한 자유의 노래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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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김수영은 전쟁이 나던 1950년 4월에 김현경과 결혼을 했다. 신접살림은 돈암동이었다. 전쟁 후 인민군에 점령된 서울에서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여성동맹들이 구성되었다. 서울을 떠나지 않은 김수영은 문학가동맹 문우들과 함께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용군으로 편성돼 있었다. 김수영이 속한 의용군은 서울을 떠난 지 7, 8일 뒤 평안남도 개천에 도착했다. 행군 도중 많은 미군의 공습이 있었다. 그리고 북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전쟁 중이어서 그런지 말이 아니었다.

미완인 자전적 소설 「의용군」에서도 잠시 언급되지만, 김수영은 임화를 깊이 경외하고 있었다. 또 그를 통해 사회주의에 호감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의용군 체험을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김수영은 윤리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이는, 특히 뒤에 살펴보겠지만, 4·19혁명 이후에 쓴 일기에서 그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김수영이 속한 의용군 부대는 개천에서 북쪽으로 7킬로미터 쯤 떨어진 훈련장에 배속되었다. 이 시절에 대한 회고로는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 한 구절이 있다. “내가 6·25 후에 개천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벌인 후 전세는 인민군에게 크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0월 20일 평양 공격을 감행한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의용군의 대열의 지리멸렬한 틈을 타 김수영은 탈출을 감행했다. 김수영은 민가에 가서 헌 옷들을 얻어 입은 다음 소련 군복과 총을 야산에 묻고 남쪽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는 곧 북한의 내무성 군인들에게 붙들려 내무성으로 끌려갔다. 이 일에 대해서도 김수영은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 기록을 남겼다. “북원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 내무성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즉 내무성 군인들에게 한국군이거나 미군 앞잡이로 오인되어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파묻었던 군복과 총을 사흘에 걸쳐 찾아내 가까스로 신원을 증명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수영은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개성 근교에서 미군의 스리쿼터를 얻어 타는 행운을 입기도 했다. 서울 근교에서 미군과 헤어져 그는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돈암동 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아내가 아직도 거기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아 서울 시내로 향했다. 종로 5가쯤 와서 이번에는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들에게 빨갱이라고 숱하게 얻어맞고 난 다음에 인천으로 끌려 갔다가 다시 LST에 실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도착하게 된다. 아마도 1951년 1월경이었을 거라고 『평전』의 저자 최하림 시인은 말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또다른 지옥이었다. 1951년 5월이 되자 이른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사이에 테러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거기에 미군이 가세해 친공포로를 사살하기도 했다. 이에 맞서 친공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 육군 준장 도드를 납치하기도 했다. 다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넷 네 겹을 격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그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단지 백일몽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김수영에게 어느 날 미군야전병원에 가서 근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미군야전병원은 거제도가 아니라 부산시 거제동에 있었다. 아마도 이 행운은 그의 영어 실력 덕분이었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야전병원에서 김수영은 통역을 하면서 간호사들을 도와 환자의 뒤치다꺼리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야전병원 생활에 익숙해지자 조금 더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타임>지와 <라이프>지를 얻어 읽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수영은 1953년 어느 날 포로수용소를 나오게 되는데, 석방 경위는 확실치 않다.

「달나라의 장난」이 1953년 4월호에 《자유세계》에 발표된 것을 감안했을 때 그 이전에 석방된 것은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달나라의 장난」은 포로수용소에서 나오고 난 다음 처음 발표한 작품인데도, 작품 어디에도 전쟁이나 포로수용소 생활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강하게 그 기억들을 억압하며 쓴 작품인지 여기서 우리는 유추할 수 있고, 또 그 억압된 기억과 「달나라의 장난」 사이에 얼마나 큰 심리적 공백이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작품 전편에 깔린 설움과 비애의 정조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953년은 중간에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것을 감안하면 꽤 많은 시를 창작한 해가 될 것이다. 아마도 4·19혁명을 전후로 한 1960년부터 1961년 사이에 창작한 양 다음이 아닐까도 싶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는 전쟁을 겪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유일한 작품인데, 이 시에서 김수영은 자신을 “민간 억류인으로서” 규정하고 있다. 의용군이 된 저간의 사정에서도 그는 종군작가를 원했지 전투를 수행하는 전투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사실적으로는 의용군이 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수용되었지만, 그의 내면은 언제나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듯 김수영은 전쟁을 통해 “자유”에 대한 열망을 깊이 배운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그는 도리어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길을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전쟁과 포로수용소 체험을 통해 김수영이 평생에 걸쳐 추구하게 될 ‘자유’에 대한 실존적 무게와 질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김수영을 ‘자유의 시인’이라 부를 때는 김수영이 이런 시대적, 역사적 고통을 짊어진 상태를 함께 감안해야 한다. 이 자유에 대한 여정은 1960년 4·19혁명을 맞아 어떤 환희를 느끼게 되지만 김수영의 자유는 이른바 리버럴리스트들이 생각하는 추상적이고 창백한 자유가 아니라, 언제나 시대적인 억압 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비판적인’ 자유였다. 다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보면, 김수영이 자신이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린 38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김수영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런 독촉과 권유는 사양하겠다고 밝힌다. 김수영이 생각하는 자유는 “반항의 자유”이지 국가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한 자유의 노래”, “진정한 반항의 자유”,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거듭해서 말하는 것은 그 증거에 다름 아니다. 물론 김수영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라고 했지만, 여기서 “나라”는 국가(state)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의 “나라”는 “자유가 살고 있는” “나라”였을 것이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는다.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김수영이 전쟁과 포로수용소에서 본 광경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린 삶들이었다. 전쟁을 통해 김수영은 누가 자유를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그 싸움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4·19 직후에 전격적으로 본격화되며, 간헐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