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17:08

[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연보에 의하면 김수영은 「묘정의 노래」를 1945년에 쓰고, 이태 후 조연현이 주관하는 《예술부락》에 발표한다. 이에 대해서 김수영은 한참 후인 1965년에 쓴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 제법 상세하게 기록해 놨다. 그때 김수영은 “연현에게 한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고, 그것이 대체로 소위 모던한 작품들이었는데, 하필이면 고색창연한 「묘정의 노래」가 뽑혀서 실려졌다”고 했다. 「묘정의 노래」는 김수영 자신이 어릴 때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에 대한 기억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술부락》에 다른 작품이 실렸더라면 “그 당시에 인환으로부터 <낡았다>는 수모는 덜 받았을 것”이고 “바보 같은 콤플렉스 때문에 시달림도 좀 덜 받을 수 있었으리라고” 말한다.

대체로 시인들이 자신의 옛 작품을 낯부끄러워하는 것을 감안하면, 김수영의 이런 태도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또, 이 산문을 쓴 시기가 몇몇 뛰어난 작품을 쓴 이후인 1965년이라는 점이라든가, 글의 외형은 자신의 처녀작이 무엇인지 회고하는 모양새이지만, 사실상 그는 처녀작을 핑계로 미래의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읽어야 김수영의 진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산문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아직도 나는 진정한 처녀작을 한 편도 쓰지 못한 것이다. 야단이다.”로 끝난다. 그리고 이 문장의 직전에서는 자신이 번역 중인 라이오넬 트릴링을 소개하면서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의 자각의 요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1965년 즈음의 김수영은 자신의 20년 전 작품을 비평하고 있음을 유념하면서 초기 작품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965년 즈음에서 “진정한 처녀작”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내일의 시를 미지”(「시인 정신은 미지」)의 영역에 두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김재인 역, 새물결)의 첫 장인 「1 서론 : 리좀」에서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면서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이 리좀의 힘이라고 다소 격정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이 언명을 김수영 시의 전체에 포개 보면 상동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김수영이 거의 동시대에 나타난 프랑스 현대철학의 흐름을 접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삶이 거대한 내재적 지평에서 출몰하는 사건이라는 보편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상동성은, 그렇게 이상한 일만도 아니다.

아무튼, 연대기적으로 봤을 때 「묘정의 노래」가 김수영의 처녀작이다. 김수영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묘정의 노래」에 대해서 김상환은 『공자의 생활난-김수영과 『논어』(북코리아)에서 재밌는 해석을 했다.

김수영의 처녀작 「묘정의 노래」는 20년 후에 발표된 「거대한 뿌리」나 「미역국」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역사인식을 담고 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공자의 생활난」과 같이 놓고 보면, 이미 등단 시절부터 김수영은 전통의 갱신과 모더니즘의 수용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시에서 갱신과 수용이라는 두 계기는 “나는 어떤 시인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결합된다. 그리고 시인의 정체성에 대한 그 물음은 일단 전통에서 호출한 화공과 공자에서 답을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화공과 공자 그리고 시인은 어떤 점에서 같은가? 시인과 화공은 장인匠人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나는 언어의 장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의 장인이다.(63)

「묘정의 노래」는 “과부의 청상(靑裳)”, “붉은 주초(柱礎)”, “백화(百花)의 의장(意匠)”, “관공(關公)의 색대(色帶)” 같은 표현에서 보듯 전통적인 시각 이미지를 전면에 배치한 작품이다. ‘묘정’은 제례를 담당하는 공간을 의미하는바, 이 작품에서 김수영의 전통에 대한 의식을 읽는 것에 크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는 이와 관련된 구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관공(關公)의 입상(立像)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공포가 퍽 좋아서 어른들을 따라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무수히 절을 했던 것 같다.”

어린 김수영이 가진 “이상한 외경과 공포”가 「묘정의 노래」에서 얼마간 재현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묘정의 노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이 밤 화공의 소맷자락 무거이 적셔/ 오늘도 우는/ 아아 짐승이냐 사람이냐”. 여기서 “화공”이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보다 우리는 “화공”의 상태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화공”은 지금 ‘울고 있다’. 왜냐면 이 작품에서 “화공”은 “어드메에” 담길지도 모를 ‘백련(白蓮)의 무늬’를 놓고 있는데, 그는 “향연(香煙)을 찍어” 무늬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공”은 불가능한 몸짓으로 불가능한 그림을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이다. “화공”은 과연 김수영의 페르소나인 걸까?

‘우는 화공’에는 아마도 일제 강점기 말 그가 겪었던 도쿄 생활과 징병을 피한 귀국, 다시 가족을 찾아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 후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었음 직한 삶의 설움과 비애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것은 어디에서도 발설되지 않아 여전히 ‘어두운 영역’에 웅크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 설움과 비애는 한국전쟁을 거쳐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1950년대 내내 김수영이 노래하는 설움과 비애는 이미 「묘정의 노래」에서 그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예민하기로는 두 번째 못 갈 김수영에게 청년 시절의 식민지 경험과 해방 직후의 시간이 자신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 모두에는 이를 암시하는 내용이 잠깐 언급된다.

나는 아직도 나의 신변 얘기나 문학경력 같은 지난날의 일을 써낼 만한 자신이 없다. 그러한 내력 이야기를 거침없이 쓰기에는, 나의 수치심도 수치심이려니와 세상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암흑이다. 나의 처녀작 이야기를 쓰려면 해방 후의 혼란기로 소급해야 하는데 그 시대는 더욱이나 나에게 있어선 텐더 포인트다. 당시의 나의 자세는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그야말로 완전 중립이었지만, 우정관계가 주로 작용해서, 그리고 그보다도 줏대가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닌 우경 좌경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한층 지독한 치욕의 시대였던 것 같다.(강조-인용자)

1965년이 되어서도 김수영은 지난날의 자신을 객관화시키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위 인용문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해방 후의 혼란기”는 1965년 당시까지도 김수영에게는 통점이었다. “해방 후의 혼란기”가 일제 강점기의 결과이며, 삶의 시간이 ‘지속’을 본질로 한다면, “해방 후의 혼란기”는 결국 해방 전의 시간과 맞닿을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아카넷, 2005)에서 “우리의 지나간 심리적 삶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시간 속에 위치한 자신의 사건들의 세부사항 전체와 더불어 존속한다”(167)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우리 각자가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편 같은 해에 쓴 것으로 표기된 「공자의 생활난」은 「묘정의 노래」보다 훨씬 더 모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장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反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해석에 적잖은 난점을 제공해서 해석자들을 난감하게 하는데, 어떤 비평가들은 아예 「공자의 생활난」을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작품으로 치워놓으려는 경향마저 보인다. 이는 다시,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 김수영이 언급한 내용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김수영은 이 산문에서 「공자의 생활난」에 대해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아메리카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은 이 사화집에 수록하기 위해서 급작스럽게 조제남조(粗製濫造)한 히야까지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후 내용은 「아메리카 타임지」가 발표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공자의 생활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메리카 타임지」에 얽힌 에피소드 같은 게 없어서일 수도 있고, 김수영 자신에게 앙금처럼 남아 있는 무엇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