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그는 후회에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하는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모임 대표 정태운
공인중개사 자격 취득···전세사기 피해자 돕는 ‘주거안정 네트워크’ 준비

09:05
Voiced by Amazon Polly

이틀 전 숙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4월 30일 밤 11시 조금 넘은 시간, 시내에서 술을 한잔하고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같은 건물 7층 피해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 흐느끼는 소리가 10분 넘게 이어졌다. 달래던 태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불안함이 태운마저 집어삼키려 했다. 하필 그의 남편은 외출 중이었다. 태운은 비상연락을 위해 저장해 둔 그의 아들에게 전화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아들이 달려왔다. 태운은 새벽 5시까지 7층 가족과 술을 마셨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

5월 2일 저녁 7시, 대구에서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 딸이었던 그는 유서에 ‘나도 잘 살고 싶다’고 썼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로도 피해자는 계속 늘었다. 2023년 6월 특별법 시행 이후 올해 3월까지 대구의 전세 피해 신청 건수는 모두 1,021건, 이중 피해자로 인정된 건수는 620건이다. 전체의 68.5%가 20~30대다. 이들은 오늘도 꿈과 미래가 멈춘 집으로 귀가한다.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정태운(34)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역의 피해자를 모아 정부와 지자체에 대책을 요구해 왔다. 지난 2년은 태운을 어떻게 바꿨을까.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다’. 지난 1년간 수없이 보고 듣고 읽은 문구가 문득 낯설었다. 태운은 무대 스크린에 틀어진 추모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상에서 고인의 유서를 읽는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태운처럼 전세사기 피해자였다. 2023년 태운이 사는 대구 북구 침산동 빌라에서, 2024년 그녀가 살던 남구 대명동 빌라에서 전세사기가 터졌다. 두 사람은 피해자모임에서 만났다. 그녀는 2024년 5월 1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년이 흘렀다. 대구 동성로에서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대구, 경산, 구미, 인천 등 전국 각지의 피해자들이 참석했다. ‘전세사기 특별법의 기한이 2년 연장되어 다행’이라거나 ‘같은 날 경기 성남에서 9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며 태운은 익숙한 얼굴들의 어깨를 안았다. 전국의 집회에서 만났던 이들이다. 나눠 입은 검은색 티셔츠 뒤에는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다’라고 쓰였다.

▲5월 2일 열린 ‘대구 전세사기 희생자 1주기 추모제’. 대구, 경북 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맨 앞줄에 앉았다.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피해자들이 아무리 되뇌어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다. “특별법이 생겼으니 보상받고 끝나지 않았냐” 묻는 사람도 있다. 추모제가 끝난 뒤 태운은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라는 현수막 붙은 건물로 귀가했다. 일 년 넘게 준비한 개인회생 신청도 현재진행형이다. 태운이 기록하는 대구·경북의 피해자 수는 계속 쌓인다. 평생 모은 돈이든 대출받은 돈이든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막막한 금액인 건 모두가 같다. 사정없는 집도, 절박하지 않은 집도 없다. 대구에서 처음 피해자모임을 꾸린 태운은 지난 2년간 그 사연을 자신의 어깨 위에 하나하나 쌓았다.

나는 왜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나

나는 왜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나, 태운은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그 생각을 해야 한다는 모순에 갇혀 있다. 일찍부터 길에서 돈을 벌었다. 피자와 치킨을 함께 파는 동네 음식점에서 배달 일을 시작한 게 18살 때다. 군대를 다녀오고선 구미의 인력파견 업체에 취업했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월셋집이 그가 처음 가진 공간이다. ‘진짜 집’에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옮겨 다니며 공장, 배달, 식당에서 2~3개 일을 동시에 했다.

그때만 해도 태운은 자신이 살아본 지역 중 대구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 생각했다. 2022년 대구역 근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뉴스에선 계속 집을 사라고 부추겼다. 계약금을 넣고 남은 돈으로 전셋집을 구했다. 당시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0.9%였다. 그럴 바엔 분양받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월세보단 전셋집에 사는 게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전세보증금 1억 원인 대구 북구 다세대주택에는 방 3개에 화장실 2개, 엘리베이터도 있다. 33평의 방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태운은 집다운 집이라 생각했다. 깨끗한 신축 빌라에 공인중개사도 아무 문제 없다고 자신했다. 신탁매물이었지만 집주인은 추후 신탁사에서 동의서를 받아주겠다는 특약도 넣었다. 계약서를 옷장 깊숙이 넣은 태운은 아파트 잔금을 모으기 위해 공장 생산직으로 취업했다. 계약직이지만 월 330만 원에 맡은 업무도 할만했다. 정착할 일만 남았다 생각했다.

▲대구 북구 침산동에 있는 전세사기 피해건물. 태운은 아직도 이 건물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건물은 현재 경매가 진행 중이며, 임대인은 지난해 7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23년 5월, 현관문에 내용증명이 붙었다. 문구 하나하나를 태운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귀하는 적법한 계약 및 동의 없이 해당 물건에 불법으로 전입 및 점유하고 있어 본 담보물의 채권자로서 손해가 가중되고 있다. 2023년 5월 31일까지 자진퇴거 하여 주시길 요청드린다.’ 기간 내 이사하지 않으면 명도소송 및 부동산 인도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임대인은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넘기고도 본인이 소유자인 것처럼 속여 태운을 비롯한 17가구의 보증금 15억 원을 가로챘다. 태운의 전세보증금 1억 원은 20대 내내 가방 하나 들고 전국에 돈 벌러 다닌 시간을 의미했다. 길에서 구른 그 시간 때문에라도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결국 아파트 분양권을 포기했다. 잔금을 넣을 수 없었다. 전세보증금도 온전히 돌려받는 걸 포기했다. 경매에 넘어가도 태운은 후순위였다. 공장에서도 잘렸다. 피해자모임을 꾸렸는데, 기자회견이고 국회의원 면담이고 죄다 평일 낮에만 열렸다. 공장에 양해를 구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태운은 배달 일을 다시 시작했다. 언론에 인터뷰하고 피해자들과 국회, 대구시청, 국민의힘 국회의원 사무실을 찾아가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 후 1년, 후회에 멈추지 않기 위해서

“5월은 가족의 달입니다. 고인의 아이, 부모는 어떤 5월을 보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을 대표해 한민정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이 추모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한 위원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운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세사기가 사회문제로 부상한 초기부터 피해자들을 도운 활동가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며 태운은 뒤를 돌아봤다. 2년 내내 지겹도록 열린 기자회견에 머릿수를 보태 준 얼굴들이 보였다.

주저 앉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그의 앞에 선 활동가들과 그의 뒤에 선 피해자들이. 1년 전 함께 피해자모임 활동을 하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운은 자꾸 마음이 꺾였다. 사십구재까지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던 삶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았다. 임차인 편에 선 공인중개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주문처럼 그렸다. 독하게 마음먹기 위해 소문을 냈다. 대구시 토지정보과 공무원은 응원과 함께 배달앱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기대들에 부응하고 싶었다.

시험은 한 번에 통과했다. 책에 나오는 문구마다 사람들 얼굴이 겹쳐 보였다. 태운은 그 절실함이 자신을 정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 합격증을 받고서야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동료들과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는 ‘주거안정 네트워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꼼꼼’이라 지었다. 전월세 임대차 계약서를 쓸 때 무엇을 따져야 하는지 꼼꼼하게 알려주겠다, 전세사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꼼꼼하게 돕겠다는 의미다. 곧 준비위원 모집을 시작해 하반기 중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11일, 태운은 대구시청 산격청사에서 2024년도 제35회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자 자격증을 받았다.

태운은 1주기 추모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기 위해 며칠에 걸쳐 글을 썼다. 고인의 죽음을 이용하는 건 아닐까 싶어 쉽게 써지지 않았다. 왜 그는 버티지 못했나, 왜 나는 그를 좀 더 들여다보지 못했나 자책도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나는 잘 버티고 있나. 할 수 있는 건 다짐뿐이었다.

“고인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발로 뛰고 자료를 모으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 아닌 무책임한 제도, 느린 행정, 외면하는 정치가 만들어 낸 사회적 타살입니다. 여전히 우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세상에 있습니다. 살고 싶다는 그 절규에 사회가 응답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발언문을 읽는 그의 옆에 새로운 얼굴들이 섰다. 최근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구미 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이었다. 꿈이 멈춘 집으로 귀가하는 마음을 태운은 잘 알았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