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4:48

[=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

토마 피케티, 엠마뉴엘 사에즈 등 70여 개국 100여 명의 소득분배 연구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네트워크, ‘세계 부(富)와 소득 데이터베이스(The World Wealth and Income Database, WID.world)’는 지난 12월 14일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http://wir2018.wid.world)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 37년간 세계 상위 0.1%인 760만 명이 얻은 부가, 하위 50%인 38억 명에게 돌아간 몫과 같은 수치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말로만 들었던 ‘0.1:99.9’ 사회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의 빈부 격차는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고, 중동이나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극단적 수준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세계 상위 1%(약 7,600만 명)의 부유층이, 1980년부터 2016년 사이에 늘어난 부 중에서, 27%를 가져갔다고 밝혔다. 나아가 최상위 0.1%(760만 명)는 13%, 0.001%(7만6천 명)는 4%를 차지하는 등 부자들 사이에서도 큰 격차가 존재하며,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것은, 하위 50%와 상위 1% 사이에 있는 약 40%에 해당하는 글로벌중산층이 이 기간에 이룬 부의 성장률이 ‘0’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간 ‘낙수효과’를 운운하며 ‘파이(경제성장)’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류 성장론자들의 논리가 허구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상위 계층(0.01%, 0.1%, %) 부의 점유가 심화와 중산층 몫 하락 (세계 불평등 보고서, WID.world)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전 세계적으로 두루 진행됐지만, 특히 신흥개발국에서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동의 상위 10%는 국가 소득의 61%에 해당하는 자산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도와 브라질(55%), 사하라사막 남쪽 아프리카 국가(54%) 등에서도 소득 집중이 심화되어 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유럽은 37%로 상대적으로 정도가 덜했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47%였고 특히 미국은 1980년에 상위 1%의 점유율이 22%였던 것이 2014년에는 37%로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고 할 때, 2050년에 이르면 세계 상위 0.1%가 글로벌중산층 40%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불평등과 격차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 없이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세계 상위 1%의 소득 점유율이 현재 20%에서 2050년에 24%까지 증가할 것이며, 하위 50%의 점유율은 9% 미만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불평등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 폭등, 누진세를 포함한 조세제도의 퇴행,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 과도한 특허 보호, 기업이나 부유층에 유리한 정책 등이 주요 원인으로 제시됐다. 또한, 공공자산이 민간자본으로 흡수되어 간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보고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의 부는 대폭 늘었지만, 공공자산은 오히려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는 성장의 열매가 대다수 중하위 계층에 돌아가지 않고 상위 계층에 집중적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선 소득세의 누진세율을 높이는 것과 같은 세금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조세회피처를 통해 이루어지는 불법 자산 은닉 차단,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WID와 이번 <세계 불평등 보고서>를 주도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자신의 책, 『21세기 자본』에서 밝히고 있는 대안과 맥을 같이한다. 보고서는 “미국 방식을 탈피하면 불평등 심화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 방식이란 불평등 심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 지향을 뜻한다. 특히 트럼프 정부 들어서서 진행되고 있는 법인세, 부동산세 인하와 같은 부자를 위한 제도 개편은, 미국을 지금보다 훨씬 더 불평등한 세계로 이끌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적으로 단합된 정치적 행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것이며, 불평등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파국이 올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경고하고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치적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이 같은 맥락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는 등 적극적인 분배 및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아울러 교육을 통한 불평등 해소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정보를 익힐 수 있는 교육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대물림 될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상위 10%의 부모를 둔 자녀는 대학 진학률이 90%지만, 하위 10%의 자녀들은 20~30%만 대학에 진학한다. 소득 격차가 교육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 격차 해소와 공공성 확보는 불평등 해소의 출발점이다. 보고서가 제안하는 보건 및 환경보호를 위한 공공투자 확대 방안도 소득과 부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 필요한 대안으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기술의 진보와 불평등

미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의 개인 자산이 1,000억 달러(약 109조 원)를 넘어섰다는 소식이 최근 보도된 바 있다. 이는 우리나라 한 해 전체 예산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베조스는, 1990년대 말부터 줄곧 세계 최고 부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빌 게이츠를 처음으로 제치고 부의 꼭대기에 올라앉았다. 그의 최고 갑부 등극은 최근 놀라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아마존의 무한 확장과 궤를 같이한다.

아마존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로서 엄청난 규모의 물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아마존은 사상 최고 매출을 올렸고, 미국 온라인 매출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그 결과 아마존의 주가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베조스의 자산도 급격히 늘어났다. 300달러로 출발한 온라인서점 아마존은 23년 만에 시가 총액 4,999억 달러(약 560조 원)에 이르는 거대 공룡 IT기업이 되었다. 최근에는 전자상거래 외에도 인공지능, 클라우드 시스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으며 오프라인 유통 매장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이 설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한 책, 『인간은 필요 없다』(2016)에서 저자 제리 카플란은,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를 등장시킨다. 카플란은 베조스가 1년에 35억 달러, 주말 포함 날마다 96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며, 미국 대졸자가 평생 버는 돈인 230만 달러, 고졸자의 130만 달러와 비교하고 있다. 이마저도 대졸자나 고졸자가 실업의 위기에 처하지 않은 노동자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비교다. 카플란은 베조스가 토요일 골프장에서 하루를 그냥 보내더라도 대졸노동자 4명이 평생 버는 돈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지적한다.

돈으로만 따지면 베조스의 하루는 대졸노동자 4명의 평생을 능가한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베조스의 당시 개인 자산은 320억 달러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앞서 밝힌 바대로 베조스의 개인 자산은 이미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대졸노동자와 베조스의 격차는 불과 1년 사이에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천문학적이라는 말은 사실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제시된 데이터 수치 차이가 너무 커서 이대로라면, 카플란은 매년, 아니 매달 베조스 자산에 관한 통계를 수정해서 책을 다시 찍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카플란이 베조스를 언급한 것은 기술자본이 만들어내는 실로 가공할 만한 이익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 문제를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애플, 구글, 아마존과 같은 기술자본을 근간으로 하는 IT기업들은 짧은 기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 성장을 이루었다. 금융자본을 등에 업고 기존 산업생태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규모를 확장해 왔다. 그 과정에서 부의 집중화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노동의 배제, 분배의 단절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 문제가 이윤의 전유나 부의 독점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자본의 이윤 독점은 지속해서 이루어져 왔다. 다만 자본이 획득한 이윤은 (실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임금 노동으로 분배되는 것이 통상적인 과정이었다. 고용이 전제된 생산 시스템 아래에서, 어쩔 수 없는 분배가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자본은 인간 노동을 결코 전제하지 않는다. 외려 최선의 수단을 동원하여 배제하려 든다. 산업사회 초기에 자본이 기계화나 자동화를 생산라인에 도입한 것은 생산단가를 낮추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분석도 무의미해졌다. 첨단 디지털 기술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지우기 위해 존재한다.

아마존은 2014년 로봇자동화 기업 키바시스템을 인수하여 자사의 거대 물류 시스템에 상품 운반 로봇 ‘키바’를 도입했다. 키바는 그동안 충실히 일하고 있었던 수많은 인간 노동자의 일을 순식간에 대체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정확하게 주어진 작업을 수행하는 키바를 대신할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존이 걸어온 길을 보면, 아마존의 꿈 혹은 제프 베조스의 꿈은 작업장에서 인간의 흔적을 지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소비자가 인공지능 비서 ‘에코’를 통해 물건을 주문하면, 분류된 상품을 ‘로보-스토’가 들어 올리고 로봇 ‘키바’는 정해진 자리에 물건을 운반하고, 운반된 상품은 무인기(드론)에 실려 순식간에 주문자에게 배송된다. 주문에서 배송까지 인간이 끼어들 틈은 많지 않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라도 로봇보다 중요한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작업장에서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한 로봇은 없다. 로봇을 돕기 위해 인간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이마저도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마존 물류센터 로봇 키바(Kiva)

아마존의 꿈은 무인 시스템이다. 애초 전자책 기기 킨들을 만들었던 것도 책을 읽기까지 사람의 손을 대폭 줄이기 위함이었다. 아마존은 물류센터의 자동화에 이어, 계산대 없는 마트 ‘아마존고’를 선보였다. 아마존고가 식료품이나 잡화를 파는 일반 마트와 다른 점은 딱 하나다. 계산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계산원도 없다. 계산부터 재고 정리까지 모든 시스템이 인공지능으로 움직인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들고 마트 밖으로 나가면 된다. ‘인간은 필요 없다’가 더 이상 상징적 선언이 아니라 있는 현실이 됐다.

작업장의 무인화는 곧장 고용의 배제를 가져온다. 고용이 성립하지 않는 한 이윤은 노동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노동으로 분배되지 않는 이윤은 자본의 독점과 집중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금융자본으로 귀속된다. 금융자본은 기술자본을 추동해 고도의 기술산업을 창출한다. 자동화시스템에 밀려난 노동자는 생산과 분배 모든 과정으로부터 소외된다. 그 결과 불평등의 심연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에게 물고기를!

“어떤 사람에게 물고기를 그냥 준다면 그를 하루만 배부르게 할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 평생 배부르게 할 것이다.” 익숙하게 들어왔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은 물고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물고기를 주는 것”이다. 『분배정치의 시대』(원제: Give a Man a Fish)를 통해 제임스 퍼거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분별한 개발과 생산을 통해 이미 물고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또다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잡아놓은 물고기를 아무 조건 없이 나눠주는 것이 필요하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강제노동의 신화에 젖은 사고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자산인 물고기를 함께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평등 극복의 해법을 여전히 생산과 노동의 사이클에서 찾는 관점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자본 수익이 노동으로 분배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생존 조건으로부터 밀려난 노동자는 사회적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생존 조건을 박탈당한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생존 수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 수단은 ‘돈’이다. 짐작하겠지만 ‘기본소득’에 관한 상상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지금 이 시대의 ‘물고기’는 바로 ‘돈’, 즉 ‘현금’이다.

물고기는 물고기를 잡아 왔던 사람, 즉 생산에 참여하여 노동의 가치를 구현해 왔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물고기를 잡는 새로운 방법이 나왔다고 해도, 이를 배운 다음 물고기를 잡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물고기를 새로 잡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잡아놓은, 남아도는 물고기를 서로 나눠 가지는 게 새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다. 로봇세처럼 새로운 기술(기계)에 세금을 물리는 것보다 훨씬 획기적이면서 더 나은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제도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물고기를 나눠주는, ‘기본소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든 행위를 구속하는 ‘자본과 노동’, 이 양자의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생산근본주의나 노동제일주의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근대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자는 노동의 자율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제대로 꿰뚫어 본 것처럼, 노동은 노동자에게 고유한 생명활동이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팔아야 할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렇게 상품으로 취급된 노동, 즉 고용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자본과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를 두고 정치적 생태주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에서, “노동과 자본은 ‘돈 벌기’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된다”고 비판했다. 자본의 논리인 경제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자본의 공범이 된 노동의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는 일이다. 파괴적 성장을 향해 치닫는 자본을 거부하지 않는 노동은 결국 공멸의 공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가 환기하는 것처럼, 불평등은 현시기 인류에게 가장 시급하고 당면한 위협이다. 미국의 경제성장 역사와 성장의 종말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에서 로버트 J 고든은,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심화된 불평등은 미국인의 생활수준 성장률의 속도를 늦춘 강한 역풍이었다.”고 지적한다. 고든은,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처럼 상세한 통계 자료를 통해 불평등이 향후 미국 사회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평등을 심화시켜온 요인들의 위세는 강력하여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로봇,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의 꾸준한 진보와 세계화에 의한 역외 생산으로 미국의 중간소득의 일자리 기반이 잠식당하리라 전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은 교육을 통해 계속 재생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 살핀 불평등 현실에 관한 근거와 분석은 우리에게,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는 올해 초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의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했던 질문과 같다. 바우만은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면서 무비판적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관습에 의문을 제기한다. 개인의 이윤추구, 경쟁, 경제성장, 소비지상주의처럼 우리에게는 숙고하거나 검토된 적이 없는, 이미 믿음으로 굳어진 교의에 관해서 반성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바우만은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과 같은,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이 “불평등의 결과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 된 소비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갖진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처럼,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고 있는데도, 왜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 인류 전체를 충분히 먹여 살릴 만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도 왜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도저히 용인하고 묵과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불평등과 격차를 감수하고만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뾰족한 답은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나와 있는데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거나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사태–인간의 사용가치 한계를 벗어난 거대한 부가 인간의 실제 삶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당연하게 용인되는 불평등과 격차에 관해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용인을 넘어서 불평등이 마치 세상을 이끄는 원리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저 허위와 기만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