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기해왜란’에 삼성을 다시 생각한다 / 박권일

11:28

큰 교차로 조망지점에는 대개 폐쇄회로 TV 철탑이 설치된다. 한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인 강남역 사거리에도 있다. 2019년 7월 28일 현재, 거기에 사람이 올라가 있다. 곡기를 끊고 49일째 농성 중인 김용희 씨다. 높이 25미터, 사방 1.3미터. 본디 카메라를 놓기 위한 공간이므로 당연히 성인이 발을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다. 폭우와 무더위가 교차하는 요즘 같은 계절엔 그야말로 쇠우리(iron cage)로 만든 지옥이다. 그는 왜 거기 올라간 걸까?

▲삼성 해고자 김용희 씨가 강남역 CCTV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오늘(7월 29일)로 50일차를 맞는다. [사진=참세상 김한주 기자]

며칠 전 60세 생일을 맞은 김용희 씨는 삼성 해고노동자다. 1982년 삼성정밀 주식회사 시계사업부에 입사했던 그는 1990년 삼성그룹 경남지역노조 설립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돼 활동하다가 1991년 해고됐다. 해고무효 소송 끝에 사측과 복직 합의를 했지만 삼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약속은커녕 ‘노조를 포기하라’는 말을 듣지 않자 손과 팔을 포승줄에 묶어 감금‧폭행하는 등 끔찍한 짓을 자행했다고 한다.

지난 7월 12일 ‘반올림’ 등 시민단체들이 김용희 씨가 농성 중인 철탑 인근 서울 서초구 삼성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청와대와 삼성 측에 “한 노동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만큼 문제해결을 위한 긴급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시민단체들은 ‘법적 소멸시효 운운하기 전에 평생 고통받은 노동자의 비명에 귀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흔히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이라고들 한다. 말부터 틀렸다.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는 시민의 기본권에 속한다. 제대로 된 법치주의 국가라면 일개 기업이 국민의 기본권을 공공연히 제한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무노조 경영’은 원칙도 뭣도 아닌 그저 불법 노동 탄압일 뿐이다. 선진국에선 기업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무리수지만, 삼성은 창업 이래 지금까지 무노조를 고수하며 승승장구해왔다.

삼성이 노조를 만들려는 김용희 씨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왔다는 사실은 수십 년간 많은 사건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악행은 단지 무노조 원칙에 그치지 않는다.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박근혜 정권과 뇌물 및 정경유착 사건, 이재용 불법 상속과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등 삼성의 범죄 행각은 책 수십 권으로도 모자란다. 미래의 역사학자가 지금의 삼성을 꼼꼼하게 기록한 자료를 읽으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경제 범죄 조직”이라 기록할지 모른다. 삼성의 악행 하나하나는, 고용 등 경제적 기여로 대충 무마될 수준이 아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병에 걸리고 죽어갔음에도 삼성은 수십 년간 모르쇠로 일관하며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왔다. 소수의 노동자, 헌신적 활동가, 양심적 시민들이 치열히 싸운 결과 최근 들어 겨우 삼성의 마지못한 인정을 끌어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 투쟁의 결과로 조금씩 산업 안전관리 수준을 높일 수 있었고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할 제도도 하나씩 마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삼성이 반성하고 변했다는 신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삼성의 해외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공할 노동 착취와 잔혹한 인권유린 실상을 고발한 <한겨레>의 기획 ‘글로벌 삼성 지속 불가능 보고서’는 이른바 ‘삼성 DNA’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새삼 환기한다.

최근 일본의 반도체 재료 수출규제가 본격화하자 재벌과 친재벌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안전관리 규제 완화”를 외치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권은 열렬히 화답했다. 화학물질 안전관리 규제를 완화하면서 동시에 관련 노동자의 특별 연장근로까지 허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2013년 화성공장 불산 누출 사고 당시 한 명이 죽고 네 명이 다치는 상황에서 작업자를 대피시키지 않고 사고를 은폐하려다 발각된 사태를 보면, 삼성 같은 부도덕한 기업에게 ‘안전관리 규제완화’가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잘 알 수 있다. 해마다 엄청난 사람들이 과로사로 죽어가는 ‘세계 최장 근로시간’의 나라에서 “특별연장근로” 운운하는 정권의 행태는 이 정권이 과연 “사람이 먼저”라던 ‘촛불 정권’이 맞는지,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일본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 조치가 본격화하던 시점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글이 있었다. ‘개싸움은 우리가 한다.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삼성… 애증이 교차하는 우리나라 대표기업입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대표주자이면서 범법행위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삼성의 옆구리에 비수를 들이대고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우리 자식에게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 들어오는 건 못 참습니다. 때려도 우리가 때릴 겁니다.”

“우리 자식”이라니, 비유치고도 우습다. 부모(시민)가 노조 만든다고 할 때마다 자식(삼성)이 때려댔으니, 패륜 가족인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삼성의 범법행위를 ‘제대로’ 단죄한 적이 없다는 거다. 그러니 놀라운 건 삼성이라는 ‘괴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 괴물을 눈감아주고 심지어 열광적으로 숭배하는 대한민국 사회야말로 실은 진지한 분석과 치료가 필요하다.

‘기해왜란’이라는 단어가 신문 지면에 등장하고 ‘반일’을 핑계로 노동권을 제한하는 조치들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시절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딱 그랬다. “국민들이여 잠시 참아라. 국가의 승리가 먼저다!” 사람들을 강제로 징용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며 착취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틈만 나면 강조했다. 그건 단지 수사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본질이다. 한국 사회가 일본의 공격을 이유로 노동권을 제한하고 삼성의 악행을 묵인하거나 책임을 경감한다면, 그 행위는 미국의 공격을 이유로 노동 착취와 기업 특권을 보장하던 일제의 행위와 다를 바 없어진다. 바로 그렇게 되는 것,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 굴복이자 최종적 패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