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갖고 태어난 아이”···삼성 태아 산업재해가 드러나기까지

기록노동자 희정이 기록한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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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배 속에서 직업병에 걸렸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문장에는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산업재해는 위험한 일터에 내몰린 노동자가 겪는 일이다. 그런데 세상 빛을 본 적도 없는 태아가 산업재해인 직업병을 갖고 태어난다니?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배 속에서부터 산재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아 산업재해는 국가가 가능성을 인정하고 법 조항까지 만든 질병, 혹은 장애다. 2021년 12월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태아산재법)이다. 업무상 재해가 인정될 시 해당 노동자 자녀도 건강손상이 확인되면 자녀 역시 피해 노동자로 보고 보험급여 청구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해를 증언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에 사회가 주목하기 전, 먼저 귀 기울인 이들이 있다. 활동가 그리고 기록노동자다. ‘문제를 문제로 만든 사람들’이다. 기록노동자 희정(이하 작가로 표기)은 2011년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르포집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을 통해 알린 뒤 11년이 지난 2022년 10월, 르포집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반도체 공장 근무로 인한 태아 산업재해 문제를 문제로 제기했다.

희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태아 산업재해 문제를 논의의 장에 올렸다. 이 책에서 작가는 “왜 나는 아프게 태어났어?”라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 자녀의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피해 당사자들과 전문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태아 산업재해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이 책이 삼성의 직업성 질병만 다루지는 않는다. 이 책에는 삼성뿐만 아닌, 위험한 일터에 관한 보편적 문제의식이 담겼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산업이 여성과 지역을 착취하는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다.

클린룸이 표백하는 몸
삼성-반도체 기업이 망가뜨린 것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백색 공간. 반도체가 생산되는 공간인 ‘클린룸’은 미디어에 청결한 공간으로 비친다. 어떤 이에게 클린룸에서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것은 선망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반도체 공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클린룸은 그들에게 무해한 공간은 아니었다. 클린룸은 반도체 부품의 상태에만 맞춰진 공간일 뿐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개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부품 상태를 위한 높은 기압, 온도, 화학약품은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줬다.

▲삼성 반도체 공장 내부. (사진=삼성전자)

“클린룸에서 일하면 고자 된다.” 우스갯소리로 노동자들이 말하곤 했다. 클린룸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던 초기만 해도 집중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있다. 당장 백혈병으로 시한부 진단을 받은 노동자도 있었기에, 그 문제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백혈병이나 암과 같은 극단적 형태의 질병뿐 아니라 공장에서 노동자가 겪는 다른 건강 문제 또한 문제로 인식됐다.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백혈병 문제를 세상에 꺼낸 뒤에도 희정 작가는 오랜 세월 반도체 공장 노동자를 만났다. 그들을 만나며 희정 작가는 반도체 공장이 만들어낸 질병이라는 나쁜 것 말고도 그 질병을 겪은 사람에 대해서도 더 깊게 알게 됐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직업성 질병과 관련해서는 단지 현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뿐 아니라 그 자녀에게도 질병이 전달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런데 아픔만 보인 건 아니었다. 단지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삶을 파괴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주변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능동적인 인간의 모습 또한 발견했다.

“첫 번째 책을 쓸 때 故 황유미 씨를 비롯해 피해 당사자의 피해자성만 강조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있었어요. 다시 생각해보니 황유미 씨에 대해 쓴 건데 오히려 아버지인 황상기 씨에게 시선을 돌렸고, 정작 황유미 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을 계속 만나며, 피해자를 피해자성으로만 주목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다시 인터뷰를 시작하니, 자기 주도성을 갖고 활동하는 이야기들이 보였어요. 자신들의 삶이 꿋꿋하게 구축돼 있었고, 그 자체로 역동적이었어요. 질병은 사람을 망가트리는데, 또 신기한 건 그래도 사람이 잘 안 망가진다는 거예요. 그게 사람이 가진 힘이에요.”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 직업성 질병을 제공한 기업에도 분노가 깊어졌다. 유해성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알고도 이윤을 위해 사람들을 위험한 일터에 보냈을 텐데. 그렇게 고통을 겪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면서, 희정 작가는 삼성과 반도체 기업이 망가뜨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하기로 했다.

피해자이지만 피해자를 넘어서는 사람들

이혜주(가명) 씨는 여상을 나와 반도체 공장 오퍼레이터로 취직했다. 급여는 여성 임금을 고려하면 상당한 편이었고, 삼성이라는 이름은 애사심을 느낄 정도의 상징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아팠다. 아들은 식도폐쇄증과 콩팥무발생증을 지니고 태어났다. 아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심각한 두통을 앓았고 달팽이관이 함몰되는 현상도 알아챘다. 아들과 병원에 오가는 생활을 이어오다, 혜주 씨는 퇴사를 결심한다. 퇴사하고서도 혜주 씨는 아들의 질병이 자신의 삼성 근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라도 한 섬에서 태어나 삼성에 취직해, 클린룸에서 11년, 사무직으로 8년 일한 김수정(가명) 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삼성 합격은 동네의 자랑이었는데, 아이를 임신하고서는 사정이 바뀌었다. 초음파로 배 속의 아이를 봤더니 신장 하나가 없었다. 서울 큰 병원에서 진단과 수술을 받는 게 아들의 어릴 적 일상이었다. 아들은 “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어?”라고 자꾸 물었다. 수정 씨는 삼성 사무직으로 직무를 옮겨가며 일과 돌봄을 병행했다. 그때만 해도 수정 씨는 삼성 근무 덕에 치료비라도 있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섬에서 태어나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직한 정미선(가명) 씨에게도 삼성은 자랑이었다. 1991년부터 8년 동안 삼성에서 일했고, 퇴사 이후 미선 씨는 갑상선암, 류머티즘, 뇌전증, 자궁경부 이형성증 진단을 받았다. 아들은 태어난 지 3일 만에 황달이 온 듯 얼굴이 노랬는데, 선천성거대결장증을 진단받고 대장을 제거했다. 수술은 다행히 잘 됐지만, 미선 씨는 여전히 아들의 질병이 자신 탓이라는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다.

희정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한다. 그들이 어떻게 삼성에 취직하게 됐고, 자신이나 자녀가 질병을 진단 받은 뒤에도 어떻게 삶을 긍정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썼다. 역설적이게도 책에 나타나는 그들의 ‘삶의 긍정’을 향한 몸부림들이, 삼성이 망가뜨린 것을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도서출판 오월의봄

반도체 공장 산업재해 문제는 지역 문제다
피해자 인터뷰 장소가 서울 큰 병원 근처였던 이유

희정 작가와 삼성 산업재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단체인 반올림은, 단체가 파악한 질병과 사망 사례를 살펴보다 몇 가지 경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삼성 반도체 공장 현장직(오퍼레이터)은 ‘고졸 혹은 전문대졸’, ‘여성’, ‘지역 출신’으로 요약됐다. 수도권 출신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왜 삼성 공장 현장직에서 4년제, 서울 출신을 만날 수 없을까. 희정 작가는, 전자산업이 원하는 순종적 노동자의 이미지에 맞춰 노동자를 길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라고 추정한다.

“과거 미디어에 나오는 전자산업 생산직 여성의 이미지가 있어요. 손 빠르고, 섬세하고, 순종적이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이죠. 거기다가 먼 지방에서 채용하면, 사회생활이 처음인 이 여성들은 가족도, 지역 인맥도 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돼 지역사회와 분리시켜 관리할 수 있게 되죠.”

희정 작가는 1년여 기간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인터뷰 장소가 대체로 서울 큰 병원 근처였다는 점도 떠올렸다. 반도체 공장에서 병을 얻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본인과 자녀 치료를 위해 서울을 찾는 것이다. 2세 직업성 질병 문제는 삼성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좁게는 반도체 산업의 작업환경 문제에서 넓게는 직업성 질병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는 문제, 그리고 질병을 얻었을 때 부족한 의료접근권으로 인해 생기는 또다른 불평등과 불이익 문제가 됐다. 지역과 사회 전반에서 확인되는 총체적인 문제라는 설명이다.

“2021년 10월 보건복지부 자료 기준인데요. 국내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가 있는 병원 11곳 중 4곳이 서울이고 2곳이 경기도예요. 전라도, 제주도에는 없어요. 이 문제가 삼성 작업 환경으로 인한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과 사회의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인 거예요.”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기록자의 일

이 책은 “아이가 저런 건 엄마 잘못”이라는 오래 묵은 손가락질을 감수하고, 일터에 대한 애증을 딛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넘어서 피해를 증언한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과 만나며 그들의 목소리에 화음을 맞춘 활동가와 기록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증언과 요구 끝, 2018년 삼성전자는 “병으로 고통받은 근로자와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서는 공식 사과했다. 국회는 2021년 12월, 임신 중 업무로 인해 출산한 자녀가 질병 등을 겪거나 사망하는 경우 업무상 재해로 본다는 취지의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태아산재법)을 통과시켰다. 그들의 목소리가 이룩한 일이다.

하지만 2022년 10월, 고용노동부는 화학물질 중에서는 17개 화학물질만 유해인자로 인정하는 취지의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시행령을 입법 예고했다. 반올림은 태아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해 화학물질이 알려진 것만 1천여가지 이상 되기 때문에, 이 시행령은 모법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아주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내고도, 말과 기록을 끝낼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은 언제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글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막막함과 힘겨움을 잊은 채 어떤 열의로 계속 쓰는 까닭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희정 작가, 《두 번째 글쓰기》 중”

아래에 희정 작가 인터뷰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희정 기록노동자

Q 삼성 반도체 클린룸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세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실상이 어떤지 알고 있나?

반도체 공장 전부가 클린룸은 아니고, 일부 공정에 클린룸 파트가 있다. 미디어에서 접하는 클린룸은 굉장히 하얗고, 기계가 돌아다니고, 자동화된 공간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물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처럼 개념화시킨 거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사람들이 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도록 돌아다니며 일해야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사람이 아닌 상품에 맞춰서 기압도 높이고 온도도 철저하게 통제한다.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환경 자체가 건강을 고려한 게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일하는 여성은 생리통이나 생리불순과 같은 질환을 빈번하게 겪는다. ‘생리’와 ‘여성의 몸’은 표준화된, 남성화된 공간으로써 일터가 고려하지 않는 요소다. 여기서 여성노동자는 건강 상태를 고려해달라고 말할 수 없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과 같은 단체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서 조금씩 개선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의 몸과 건강에 비중을 두는 공간은 아니다. 반도체가 만들어지는 공정의 전체적인 흐름,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려고 공부도 많이 하지만 변화가 빠르기도 하고 정보 자체가 잘 공개되지 않아 한계가 있다.

Q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에서 클린룸과 반도체 공정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에 발간한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에서는 직업병뿐만 아니라 2세 직업병 문제,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타나 있다. 어떤 고민에서 작업을 시작했나?

당시만 해도 여성 몸의 건강권 문제라는 걸 거의 생각 못했다. 직업병 문제를 제기하던 초기에도 생리통, 생식질환 문제가 ‘여기서 일하면 고자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그 문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당장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문제에 시선이 쏠렸다. 나뿐만 아니라 반올림에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도체 공정의 여성 노동권, 건강권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키웠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제기한 직업성 질병과 관련한 태아산재 대법원 판결이 2020년도에 나왔는데, 그즈음부터 반도체 노동자들도 같은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겠다는 인식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책을 쓸 때, 故 황유미 씨를 비롯해 피해 당사자의 피해자성만 강조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황유미 씨에 대해 쓴 건데 오히려 아버지인 황상기 씨에 시선을 돌렸었고, 정작 황유미 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피해자들을 계속 만났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피해자성으로만 주목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보니 그런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그분들이 하는 얘기가 다채로웠다. 삼성을 떠나, 질병으로 아픈 몸으로도 다른 업체에 취직해 농성하고 싸우는 분도 있었고. 삼성과 싸운 경험으로 다른 회사에서 퇴직금 문제로 싸운다거나, 자기 주도성을 갖고 활동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삶이 꿋꿋하게 구축돼 있었고, 그 자체로 역동적이었다.

Q 실제로 이번 책에서 나타난 피해자도, 불행한 피해자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인간 삶의 복잡한 면모가 보였다.

피해자들은 지금도 사번, 입사 날을 기억한다. 청춘의 중요한 순간을 보낸 곳인 거다. 직업성 질병의 가장 못 된 점은 내가 좋아하고, 내 삶을 책임 진다고 했던 회사가 가해자가 되는 점이다. 직업성 질병은 그곳에서 있었던 좋은 감정을 후회와 자책으로 바꿔놓는다. 질병은 사람을 망가트린다. 그런데 또 신기한 건 그래도 사람이 잘 안 망가진다는 거다. 그게 사람이 가진 힘이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인터뷰했던 한 자녀가 말했다. 엄마가 멋있었다고 하더라. 반도체 작업 때문에 질병을 얻은 엄마는 그 곁에서 아무리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자책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자녀는 엄마가 그 큰 회사랑 싸운다는 게, 그리고 소신대로 행동한다는 게 대단하다고 하더라. 2세 질환을 겪는 다른 또래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으니, 부모를 이해하고 지지하면 좋겠다고 하더라. 돌봄이라는 걸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거처럼 이해하지만, 반대로 자녀가 보내는 지지도 돌봄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Q 책에서는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2세 질환 문제 외에도 여성이 마주하는 차별 문제도 보인다. 오퍼레이터로 일한 여성이 어떻게 클린룸으로 오게 되는지의 과정을 보면 잘 나타난다.

클린룸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는 실제로 대부분 여성이다. 70년대, 80년대부터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이 그런데, 전자산업의 생산직은 여성이 맡는다. 손이 빠르고 섬세하고 얌전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키운 거다. 즉,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오퍼레이터를 키운 거다.

지역 문제도 관련된다. 데이터가 없지만, 오퍼레이터 중에서는 서울 출신은 만난 적이 없다. 삼성은 지역마다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높은 이들을 채용한다. 이들은 삼성이 대기업이고, 지역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먼 곳까지 오게 되는데, 막상 반도체 공장에 오면 사회생활이 처음인데다가, 가족을 포함한 지역사회 인맥이나 인프라와도 분리된다. 관리가 쉽다.

그리고 인터뷰할 때 피해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대체로 병원 근처에 인터뷰 장소를 잡았다. 어린이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어린이 병동을 갖춘 지역 병원이 없거나 부실한 거다. 2021년 10월 보건복지부 자료에 보면 국내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가 있는 병원은 11곳인데 이 중 4곳이 서울이고, 2곳이 경기도다. 나머지는 인천, 충남 천안시, 울산, 부산, 대구에 1곳씩 있다. 전라도, 제주도에는 없다.

2세 직업성 질병 문제로 병원에 가려면 서울에 사는 사람은 사설 응급차라도 타고 병원에 갈 수 있는데, 지역에서는 현실적으로 정말 어렵다. 형편이 나으면 운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새벽에 택시를 불러서 병원 시간에 맞춰 가는 사례도 있었다. 단지 삼성의 작업환경 때문에 아프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역과 사회 전반에서 한국이 가진 총체적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Q 태아산재법이 통과됐지만, 시행령으로 적용 대상 범위를 축소하려 해 또 문제다. 이미 질병을 얻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지만, 지금이라도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뒤따라야 할까? 반도체 산업 자체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삼성 걱정을 많이 하는데, 이건 살인이다. 삼성이 정말 공정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의 유해성에 대해 몰랐나. 아니다. 먼저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국가에서 위험성 문제가 확인됐다. 알고도 위험을 감수하고 이윤을 선택한 거다. 사람을 죽였는데 그 기업이 잘 유지돼야 한다면 그게 맞나. 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10월 17일 태아산재법 시행령이 입법예고됐는데, 여기에 단 17가지 물질만 태아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화학물질로 규정했다. 17개 물질 외에도 부모 생식기능과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물질은 1,000가지가 넘는다. 올바른 시행령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독일의 경우,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했다. 노동자가 임신하면 사업주는 직업환경을 평가해서 조치해야 하고, 일하는 동안 문제가 생기면 사업주가 책임져야 한다. 임신한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촘촘하게 사업주 의무로 규정해야 한다.

Q 직업병 얘길 하다보니 르포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한국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록노동자라고도 칭한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전에 발간한 <두 번째 글쓰기>에는 작가로서의 노동에 대해서 나온다. 타인의 노동,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이다. 타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고통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겼다. 책에 담긴 문장이다. “누군가의 말을 글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막막함과 힘겨움을 잊은 채 어떤 열의로 계속 쓰는 까닭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쓴다. 이유는 간명한데, 그가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도 ‘문제’ 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더러 숨겨진 목소리를 밝히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나는 내가 목소리를 발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숨겨진 목소리라는 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들이 객체인 게 아니다. 대학생이던 시절 학내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했는데, 그때 청소노동자를 대상화하는 주류언론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글을 쓸 결심을 했다. 그 뒤로 내가 노동자를 대상화하지는 않는지 계속 죄업처럼 묻는다. 쉽지 않다.

내가 그들의 삶에 가서 그들과 나의 삶이 얽히면 새로운 이야기가 생긴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내가 지향하는 르포다. 글이 희망이고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그런 말은 싫어한다. 염치 없는 말이다. 세상을 바꿀 수도 없는데 쓰는 이유는 기록되지 않고 놓치는 이야기가 아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기록하는 사람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 많은 사람이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