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집 ‘풀물 들었네’ 박경한 시인, 북토크 열어

"한 줄은 감각이자 서정, 한 줄은 사유"
"시의 자세가 곧 삶을 대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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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밭에 풍경 하나 달았다
바람이 세면 크게 울고
잔바람이 불면 작게 울었다

수수꽃다리가 필 때도
배롱나무꽃이 질 때도
풍경은 쉬지 않고 울었다

멀리 길 떠났다가
메아리로 돌아와 다시 울었다
풍경의 본향은 울음 같았다

얼마 전 부도를 낸 친구가
술자리에서 깊이 운 적이 있었다

풍경은 우리의 울음을 대속代贖하며
가만가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풍경’ 전문

▲’라일락뜨락1956’에서 박경한 시인 북토크가 열렸다. (사진=정용태 기자)

지난 8월 세 번째 시집 <풀물 들었네>를 출판한 박경한 시인이 23일 대구 중구 라일락뜨락1956에서 북토크를 진행했다. 새 시집은 시인이 만나는 잔잔한 일상과 사모곡, 주말 농사와 자연에 관한 시 54편을 4부에 나눠 담았다.

북토크에서 박경한 시인은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가’라는 물음을 받곤 시를 그네의 두 줄에 비교하며 “한 줄은 감각이자 서정, 한 줄은 사유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도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그 시는 오래갈 수 없다“고 답했다.

박경한 시인은 “시는 순간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유한성에 대한 증언으로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이제 강물을 건넜으니 배를 불태울 때”라고 서문에 썼다.

차곡차곡 모은 신문지를 고물상에 팔았다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진 고물상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개도
오월의 상수리나무도 고물로 보였다
화장도 안 한 여사장이 준 돈으로
콩나물 한 봉지와 두부를 샀다
먹고살 만한데 웬 청승이냐고
핀잔을 주는 집사람 얼굴에 화색이 돌고
콩나물 김칫국 냄새가 집 전세를 냈다
콩나물 김칫국을 새롭게 먹어도
우리는 희한하게 고물이 되어갔다
고물이 고물을 먹어 치우는 배부른 저녁이었다
우리의 저녁은 항상 최후의 만찬이었다

‘만찬’ 전문

김수상 시인은 시집 해설 ‘지극한 시는 어렵지 않다’에서 “이번 시집은 ‘엄마 생각’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 차 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시인이 산밭에서 키워낸 작물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시집의 맨 앞에 실려서 서시의 역할을 하는 시”로 첫 번째 수록된 ‘만찬’을 들며 “이후에 전개되는 죽음에 대한 성찰로 가득 찬 시들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 주최 북토크의 사회자 하승미(왼쪽)와 박경한 시인 (사진=정용태 기자)

손바닥에 풀물 들었네

들꽃처럼 많은 사람 중에
나만 풀잎 물들었네

메뚜기 입술과
여치 발목도 풀물 번지고

풀에도 물의 길이 있는가
손금의 강물은 흘러가는데

당신은 풀뿌리 속으로 몸을 숨겼네

‘풀물’ 전문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그는 주말이면 농사꾼으로 그 옷을 갈아입는다. 6년째 400평 밭을 갈고 있는 시인의 눈에 노동과 자연은 시의 주제가 됐다. 3부 ‘산밭 일기’에 나오는 ‘말뚝’, ‘고구마 모종을 심으며’, ‘입동 무렵’, ‘파종’ 같은 시들이다. 그리고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내내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지 2부를 ‘엄마 생각’으로 했다.

엄마 생각은 ‘당신 이름을 세 번 부르기도 전’, ‘새 한 마리’, ‘피에타’를 비롯해 표제시가 된 ‘풀물’까지 짙고 옅거나, ‘죽음’으로 모습을 보이거나 하면서 전체 시집을 관통한다. ‘새들의 간이역’을 이름한 4부는 ‘새의 출근길’이나 ‘새의 옷’처럼 새를 불러낸 시와 함께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오는데 ‘첫사랑’의 추억도 호출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술래에게 들킬까 봐 정말 꼭꼭 숨는다
술래는 나를 못 보고 그대로 지나가고
어두운 곳에 혼자 남는다
술래에게 들키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어서 들키지 않고 싶은 마음 사이,
술래는 정말 나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골목길을 돌아서 나를 지나갔다

‘첫사랑’ 전문

박경한 시인은 1965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왜관 순심고에서 국어교사로 일하고 있고, 1995년 ‘오늘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앞선 시집으로 <살구꽃 편지>와 <목련탑>이 있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