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와 박승춘의 표지석

[기고] 박승춘과 극우가 위세를 부리던 시대는 끝났다

14:50

박승춘은 6년 넘게 국가보훈처장으로 있다가 얼마 전 물러난 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황교안 국무총리와 함께 바로 사표가 수리됐다. 국무위원도 아닌 보훈처장의 사표가 1착으로 수리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 말인 2011년 임명된 사람이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물러났다. 극우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박승춘이 정권의 입맛과 맞아 떨어져 두 정권에 걸쳐 장수하며 그 자리를 보지(保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극우 아이콘이라고 했다. 보훈처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보훈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따뜻한 인성(人性)의 소유자여야 한다. 헌데 박승춘은 보훈 가족을 돌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 자리에 앉게 한 정권에 보훈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인사들을 종북좌파 세력으로 매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극우인사를 안보 강사로 둔갑시켜 전국 학교를 돌며 종북좌파 척결 교육을 실시했고, 왜곡된 관점으로 제작한 DVD를 제작, 배포해서 갈등을 부추겼다. 민주와 통일 세력을 매도하기에 바빴다. 냉전 논리를 보훈 정책에 그대로 적용해 뜻있는 국민에게 심한 반발을 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합창으로 바꾸어 5.18 유족들에게 분노를 안겨준 박승춘이 작년(2016년) 기념식에서 쫓겨났다. [사진=민중의 소리 영상 갈무리]

그의 시각은 5.18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가 정한 공식 기념일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식에 직접 참석해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고 항쟁의 의미를 되새겼다. 유족을 다독이며 위로하는 데 정성을 다 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불참함으로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두 전직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만 5.18기념식에 참석했다.) 박승춘이 보훈처 주관 행사로 격을 낮추고, 이념적 접근 시각으로 본 탓이 클 것이다. 보훈처장이 5.18의 의미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았더라도 이런 결과는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박승춘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5.18 기념식에서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막고 나섰다. 참석자 모두 억울하게 숨져간 5.18 영령(英靈)들의 넋을 기리며 일어나 부르던 제창을 단 위의 합창단만 부르게 한 것이다. 유족을 포함해 대부분 사람들이 심하게 반발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그때 희생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몇 사람의 지혜가 결합한 작품이다. 백기완의 시를 황석영이 다듬고, 여기에 김종률이 곡을 붙여 널리 불린 민중가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라는 국회의 권고 결의가 있었지만, 박승춘은 막무가내였다.

▲백기완 작시, 황석영 개사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사진=5.18기념재단]

이런 자는 극우단체 대표로나 앉으면 족할 사람이지 나라의 녹(祿)을 먹는 보훈처장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정치적 중립을 견지해야 할 보훈처장이라는 사람이 소수 극우 세력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니, 새 정부 들어 사표 수리 1순위가 된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보도에 의하면 이 박승춘이 또 사고를 쳤다고 한다.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다.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 없다. 대전, 서울, 대구, 부산 등 보훈병원 4곳에 개당 1천5백만 원짜리 표지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4월 말이라고 하니 대선 직전이다. 촛불 민심으로 박근혜가 탄핵되고 정권 교체가 눈앞에 다가 온 시점이다.

이 표지석엔 ‘명예로운 보훈’이라는 글자 밑에 ‘보훈처장 박승춘’,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김옥이’ 그리고 해당 병원장 이름이 병기(竝記)돼 있다. 표지석은 당시 보훈처장이었던 박승춘의 제안으로 세워졌고, 국가유공자를 위해 쓰여야 할 보훈복지의료공단 예산을 전용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과연 박승춘답다.

▲각각 1천5백 만 원의 예산을 들여 전국 4개 도시 보훈병원에 세원 ‘명예로운 보훈’ 표지석. 마치 박승춘의 공적비처럼 보인다. [사진=SBS 뉴스 갈무리]

시쳇말로 ‘똥 싸 놓고 도망간 격’이다. 뒤의 일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행동하고 물러나는 것이. 박승춘이 물러나고 새 보훈처장이 임명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훈처장 박승춘’과 관련 기관장 2인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 아랫돌을 뒤로 돌리고 회양목을 새로 심어 가려 놓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짓인 줄은 안 모양이다.

박승춘과 극우가 위세를 부리던 시대는 끝났다. 박근혜 탄핵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들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일, 이른바 적폐 청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불의를 정의라 하고,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외치며 순리를 거부하고 역리(逆理) 편에 서서 머리를 조아린 부역자들도 이 기회에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두 번 다시 역사 왜곡에 빌붙지 못하도록…

5.18민주화운동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곧 물러 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넣은 표지석을 보훈병원 4곳에 세웠다? 거짓 사랑, 허황된 명예, 극우로 포장된 이름을 남기고 싶은 탐욕의 결과다. 이런 박승춘이 이름 없이 산화한 광주의 영령(英靈)을 기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