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원조] (3) 퇴계 이황부터 마르크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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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맥과 혼맥

대구에서 출발해 경북 안동으로 가는 길에는 엄마 까투리와 꺼병이, ‘정신 문화의 수도 안동’이라고 적힌 현판이 마중한다. 북쪽으로 한 시간가량 차로 달리면 이육사 생가와 문학관이 나온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안동댐을 지으면서 수몰위험지역으로 지정돼 지금은 이옥비 씨의 집을 포함해 3채만 남아 있다. 퇴계 이황의 후손, 진성 이씨 가문이 ‘원촌마을’에 자리 잡았다. 퇴계 이황의 14세손인 원조 형제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원촌마을

나라는 목숨이었다. 독립 운동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숙제였다. 일본이 조선을 빼앗던 순간부터 집안 어르신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평생 유학을 공부한 유림에게 조선 왕조는 지켜야 할 의리였고, 빼앗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그 해 11월까지 안동에서만 6명이 단식으로 목숨을 끊었다.1

한일병합 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진 후, 처음 목숨을 끊은 사람이 옆 마을에 사는 집안 어르신이었다. 하계마을 퇴계 11세손인 이만도(李晩燾)2다. 그는 사헌부 종3품 관직을 지냈고, 을미의병 의병장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어른이다. 급기야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으니 스스로 잘못한 탓이라 생각했다. 이만도는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에 순국한다.

형제들의 외가도 마찬가지였다. 외할아버지 범산 허형(許瑩)3은 1907년 정미의병 때 의병장을 지냈고, 외사촌 허은(許銀)4은 남편 이병화(李炳華)5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병화는 퇴계 학문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6의 손자였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을 지낸 허형식(許亨植) 장군과도 외사촌 지간이다.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은 “퇴계 학맥을 계승하는 인물들의 가장 주된 가치는 ‘무엇이 옳은 길인가’다. 이 학맥이 날줄이라면, 씨줄은 그들을 엮는 아주 조밀한 혼맥이다”며 “날줄과 씨줄이 촘촘히 얽힌 그물에는 거대한 덩어리가 올라온다. 나라가 무너졌을 때는 무엇이 옳은 길일까. 이것이 경상북도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가장 빛나는 역사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고 설명했다.

형제가 자라면서 학맥과 혼맥으로 짜여진 그물은 더 단단해졌다. 1920년대 초반 형제들은 부모님과 함께 대구로 온다.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662번지, 지금의 대구시 중구 남산동이다. 첫째 이원기가 부모님과 동생들을 보살폈다. 당시 이육사는 1920년 결혼하고 경북 영천 백학학원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립운동가 조재만, 이원대 등이 백학학원 출신이다.

▲대륜고가 소장하고 있는 이원조의 교남학원 학적부

원조와 원창은 대구 교남학원(현 대륜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육사도 함께 이곳에 다녔다는 설이 있다.

지난 2003년 대륜중고 동창회는 학내에 ‘이육사, 이원조 형제 문학비’를 세우고, 매년 문학제를 열어 그 뜻을 기억하고 있다. 교남학원은 1921년 우현서루 한켠에서 설립했다. ‘교남’은 경상도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경상도에 조선인 학교를 세우기 위해 교남학회를 꾸렸는데, 일제는 쉽게 학교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설립자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를 사들여 1925년 정식 학교(교남학교)가 됐다. 대륜고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서 조선인이 세운 학교는 이곳이 유일하다.

석은동 대륜고 인문사회부장은 “우현서루는 강연도 열고, 강습도 하는 용도로 썼는데,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남학원에) 선뜻 공간을 내준 거 같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등이 우현서루를 거쳐 갔다”며 “교남학원을 개설하자마자 600명 정도가 왔으니 지금 봐도 어머어마한 수다. 일본인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꼬장꼬장한 지식인들이 다녔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륜고에 있는 이육사, 이원조 형제문학비

원조는 1924년 대구 교남학원(현 대륜중고등학교)에 입학해 초등 과정을 마친다. 1925년 원조와 다섯째 원창과 함께 중등 과정에 입학해 1년 만에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다. 이들은 교남학원이 일제에 정식 학교 인가를 받은 후 첫 졸업생이다. 원조는 성적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위권이었다. 원창의 학적부는 최근 대륜고가 ‘대륜100년사’ 집필하면서 처음 발견했다. 원창의 이름은 ‘이원도(李源道)’로 기록돼있는데, 아버지 이름이 이가호로 일치한다. 또, 원조의 학적부와 주소(대구시 시장정 154)와도 맞다.

형제들은 안동과 대구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독립 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았다. 3.1운동 이후 민중의 힘을 확인한 지식인들은 때 마침 국내에 들어온 사회주의를 독립 운동 방법으로 삼았다. 이미 상투를 자르고, 목숨도 내놓았던 안동 유림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데도 빨랐다. 3.1운동 당시 10대였던 원조 형제에게 사회주의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김희곤 관장은 “공자가 이야기한 대동사회와 마르크스의 공산사회가 상당히 통하는 바가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되찾는데 혁명 이론도 필요하겠다는 열린 생각을 한 거다”며 “러시아 혁명 영향으로 국내에도 사회주의가 들어온다. 3.1운동 때 우리는 처음으로 민중이라는 힘을 발견했다. 석주 이상룡도 사회주의를 끌어안는다. 사회주의 자체에 올인하기 보다 민족 독립을 위해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19년에 20대 중반이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그 보다 어린 사람은 당연하다. 호치민, 마오쩌둥도 그랬다”며 “1902년생인 박열은 아나키스트로 간다. 큰 틀에서 아나키스트도 사회주의다. 1904년에 태어난 이육사는 당연히 사회주의자의 길을 가는 거다”고 덧붙였다.

▲이육사문학관에 전시된 이원조의 형제들 사진

절반의 역사

1951년 이승만 정부는 6.25 전에 월북한 작가 38명 ‘A급’으로 분류하고, 이미 간행된 작품 발매 금지 처분하고 문필 활동도 금지했다. 이때 임화, 김남천, 김사량, 이태준, 한설야 등과 함께 원조도 포함됐다. 조선 문학 비평과 해방된 조선을 바랬던 그의 문장들은 잊혀져갔다.

이원성 작가는 “요즘 젊은 문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다. 평론가로는 해방 전후 일인자였다. 월북하는 바람에 묻혀버렸다”며 “남북이 갈려져서 국토가 분단 된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민족 전체가 아쉬워한다. 특히 원조 형님은 세상에 알려야 할 유명한 평론가인데 묻혀버렸다는 사실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했다.

이옥비 씨도 생각은 비슷했다. 애초에 월북한 삼촌들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있었던 일을 없었던 역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씨는 “역사는 득세하는 사람들 편”이라고 꼬집었다.

“셋째, 넷째 삼촌은 월북했으니까 (유공자 신청) 안 했죠. 어떻게 해요. 옛날에는 좌우에 관계없이 나라를 찾아야겠다는 한 마음으로 했잖아요. 그런데 역사도 득세하는 사람들 편이잖아요. 내가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독립운동을 했으면 알려는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역사가 소멸되는 거니까. 긴 세월이 걸리더라도 알려줘야 해요” – 이옥비

▲최유창 씨

원조의 이질, 즉 아내 동생의 아들인 최유창(73) 씨는 지난 2007년부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왔다. 그의 어머니는 6.25 전쟁 때 언니를 찾으러 간다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와 이모, 이종 사촌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촌들을 만나면 이모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최 씨 역시 절반의 역사만 배우고 자란 세대다.

최 씨도 “이모부가 사회주의 사상이었지만, 독립운동을 한 건 맞다.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하는데 우리가 역사를 왜곡했다”며 “우리 때는 김일성이 독립운동 안하고, 독립운동 한 사람 이름을 도용해서 쓴다고 배웠다. 김원봉도 독립운동한 게 사실인데, 그것까지 부정하는 건 모순이다. 서훈은 정부 입장이니까 별개고, 사실을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움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강윤정 전)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부장(안동대학교 사학과)
이옥비(이육사의 딸)
김균탁 안동 이육사문학관
이원성(이육사 형제의 6촌)
최유창(이원조의 이질)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본부
석은동 대륜고 인문사회부장

참고문헌
이원기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이원록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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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삼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1919.12.9.
이원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5.4.
이원삼·이원일 대구지검 집행원부, 193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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