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묵은 폐단을 통렬히 징계하고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당私黨을 떨쳐 버리고 공도公道를 회복시키며, 농사를 힘쓰고 병란을 그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보전시키려 한다. 아, 그대 팔도의 사민士民과 진신 대부들은 나의 어쩔 수 없었던 까닭을 양해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잘못을 가지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고, 상하가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함으로써 천명天命이 계속 이어져 우리 태조太祖·태종太宗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인조실록> 권34, 1637년 2월 19일>
1637년 음력 2월 19일, 인조가 전국에 반포한 교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해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淸 태종에게 항복하고, 채 20여 일이 지나지 않아 나온 교서였다. 전쟁 패배에 대한 반성과 자기 책임,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그나마 나라가 보존된 다행스러운 상태를 백성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조는 다시금 국가와 자신에 대한 충성을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전쟁에 패한 국왕의 구구절절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는 교서이기는 하다. 이 교서 내용은 음력 3월 5일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뚫고 예안현(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까지 전해졌다.
영남에서도 오랑캐가 침입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임진년 기억을 살려 급히 의병진을 꾸리기는 했다. 그러나 병력이 전장에 채 닿기도 전에 전쟁은 끝이 났다. 경상도 지역은 의병을 일으키는 한차례 소동 외에는 전쟁이라고 할 상황도 없었고, 도성을 비롯한 북부 지역과 비교해 피해도 거의 입지 않았다. 예의와 염치로 무장되어 있었던 이들에게 남은 것은 주상이 오랑캐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로 인한 수치감뿐이었다. 마음만으로는 임금이 무릎을 꿇기 전에 오랑캐의 창을 향해 몸이라도 던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움을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유림들에게 전달된 왕의 교서 내용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조는 서인들이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옹립한 왕이다. 인조로 대표되던 서인정권의 시대였다. 이렇게 보면 병자호란은 서인정권의 외교 및 군사정책 실패가 물러온 참사였다. 김령을 비롯한 영남 유림 역시 북인 정권기 광해군의 전횡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다른 문제였다. 이 참사는 서인정권의 문제였고, 왕의 교서는 그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김령을 비롯한 당시 영남 유림들이 느낀 교서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했다. 의례적 반성과 임금의 부덕함에 모든 전쟁의 책임을 미룰 수는 없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자기 정권에 대한 책임의식과 반성 없이 서인들의 수장이 직접 나서서 교서를 작성하고, 왕의 이름으로 반포했다. 그러다보니 반성이나 대책은 없고, 오직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위안으로 교서를 끝맺고 있었던 것이다. 구구절절하게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인조의 말이 마음에 와닿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런 와중에, 대책 하나 없는 교서와 달리 천조국天朝國의 교체에 따라 바뀌는 정책들은 무서운 속도로 전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비변사에서 경상감사에게 내려온 공문에는 불과 몇 달 전까지 오랑캐였던 청을 반드시 ‘대청大淸’ 또는 ‘청조淸朝’라고 부르고, 적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가슴으로는 적이지만, 머리로는 적이 아니어야 하는 상황이 강제되고 있었다. 특히, 이들을 더욱 절망에 빠뜨렸던 내용은 바로 전날까지 사용했던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숭정 연호는 명明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마지막 공경이자 애착이었다. 연호는 황제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황제의 이름을 가지고 시간의 흐름까지 규정하면서, 한 해의 이름을 황제 재위 연도로 불렀던 것이다. 명나라를 천조국으로 여기면서 진정으로 사대의 예를 다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더 이상 숭정 연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하늘이 바뀌는 충격이었다. 원래의 하늘은 사라지고, 거기에 오랑캐가 갑자기 하늘이 되어 등장하는 충격은 그들로서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교서를 바라보는 영남 유림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명이라는 하늘을 이고 살았던 영남 유림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하늘과 땅이 바뀌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버릇처럼 붓끝을 따라 나오던 ‘숭정’이라는 연도 표기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랑캐의 연호인 숭덕崇德을 써야 하는 참담함은 수많은 병사의 죽음이나 여인들이 당한 능욕만큼이나 힘들고 아픈 일이었을 터였다. 적어도 조선에서 유림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랬다. 그래서 이들은 단순하게 왕 자신의 부덕을 논하고, 전쟁에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늘어놓는 교서가 달가울 리 없었다.
인조의 교서는 병자호란 패배에 대한 포괄적인 사과문이다. 그러나 조선 전체가 능욕과 치욕에 빠질 정도의 상황을 만든 데 대한 교서치고는 안이했다. 김령을 포함한 영남 유림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반성도 선행되지 않은 교서인지라, 아무리 왕명으로 내려진 것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적어도 정부의 사과문이라면 치열한 자기반성과 그에 대한 책임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혁신적인 대안과 실행 의지를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빠진 ‘미안’과 ‘유감’은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을 또 한 번 죽이는 말이 되는 이유이다. 4월, 유난히 ‘미안’과 ‘유감’이 난무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사과를 찾기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