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끝나지 않았다] 손석용 추모사업회 30년! 그리고 우리의 삶

벌써 30년!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습니다. 홍안의 미소년, 미소녀들은 벌서 오십줄에 접어들어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고 있겠죠. 이 글을 쓰면서 손석용 열사 10주기 기념 책자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91년 당시의 상황과 열사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염원,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들이 여전히 날이 선 채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분노로 몸부림치던 그 날들도 이제는 아련한 세월의 무게처럼 또 다른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들에게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열사의 삶보다는 우리가 사는 모습에 더 열중하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집값이 오를지 내릴지에 관심이 가고, 모아둔 돈은 없는데 노후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 자식들은 지 밥벌이는 하고 살런지에 대한 걱정 등등 일상의 무게가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드는 의문, 좋은 세상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요?

91년 당시 저는 군대에 있었습니다. TV를 통해 간간이 들려오던 바깥세상 소식은 참으로 비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많은 대학생의 분신, 그리고 전국적인 시위, 이어진 유서대필 조작과 정원식 달걀 투척사건까지. 92년 학교에 복학하고 당시 현장을 지키던 학우들과 손석용 열사 1주기 추모제를 함께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졸업 이후에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지고 비록 주변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 세월을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늘 이런 고민은 있었습니다. 여전히 현장에 남아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나는 오직 나와 가족의 안위를 지키려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자괴감까지. 젊은 날의 호기롭던 구호들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삶의 무게만이 남는 나날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저만 가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추모사업회는 몇몇 동지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집행부를 이끌어 왔던 동지들께 다시 한 번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학교 졸업 이후에도 우리 동지들은 각종 통일 투쟁, 효선이-미선이 추모 집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광우병 쇠고기 수입 금지 집회, 박근혜 탄핵, 검찰 개혁 집회 등 수많은 투쟁 현장에서 손석용 열사의 정신 아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추모사업회 위상과 진로를 놓고도 수많은 논의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친목 모임 정도의 모습이지 않느냐는 질타, 장학사업회로 전환, 발전적 해체 모색 등 여러 생각이 부딪히고 서로 상처를 주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지역 진보시민단체와 위치 정립 문제까지 참 모든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3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철이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철들지 않을 작정입니다. 열사가 염원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자주·민주·통일의 세상, 장애해방의 세상은 아직 오지 얺았으니까요. 모두가 30년 전 그 뜨거운 가슴으로, 투쟁 현장에 다시 설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품었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꿈에 다가가려는 모습. 그리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나의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 사람들 저마다의 작은 꿈이 모여 세상을 바꿉니다. 열사가 진정으로 바랐던 세상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91년 손석용 열사의 분신 항거 후 나흘 뒤 91학번 만 19세 소녀가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첫 마음을 소중하게 영원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 학우는 세월이 흘러 저와 같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몸서리치게 받아온 미식민지 반공교육과 개인주의, 그리고 방관.
이러한 것들이 나를 조금씩 괴롭히고 있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한 학우는 몸을 불살랐다.
오월,
올해 많은 학생들의 분신으로 일어나 피터진 항쟁과 부딪치며 외쳐댄 구호들이
허허 공중으로 날아간 그때에도 메워지던 가슴보단 분노로 치떨린 가슴이 서러웠다.

교정에는 그가 간 자리만 남겨놓고 학우들은 아니 학우들도 아닌 그네들은
그 자리를 스치며 수없이 지네들의 조잘거림으로, 웃음으로, 비난으로 배를 채운다.
아니, 무관심으로 방관으로 백골단의 폭력보다 더 큰 폭력으로 무참히 짓밟고 있을 뿐이다.

음악휴게실에서 흘러 나온 팝송 가사에 고개 끄덕이던 내 친구의 입술이 슬펐고,
도서관에 쳐박혀 나몰라라 하는 선배들이 싫었다.
무엇보다도 며칠이 지나면 또 웃고 무관심하고 그 죽음의 참뜻을 외면할 내가 미웠다.

허나 다짐할 터
지금은 감정으로 밖에 피어나지 못한 분노를 투쟁으로 실천으로
다음의 오월에 민들레로 다시 만나리라.

김보민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1995년 2월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