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한국 차세대 액션배우의 실마리, 안지혜 ‘불어라 검풍아’

10:42
Voiced by Amazon Polly

액션 연기는 남배우의 전유물이라는 유리천장이 깨진 지 오래다. 1979년 <에이리언>에서 외계생명체를 물리친 엘렌 리플리를 연기한 배우 시고니 위버는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를 얻었다. 배우 린다 해밀턴은 1991년 <터미네이터2>를 통해 인상 깊은 액션을 선보였다. 배우 데미 무어는 <지. 아이. 제인(1997년)>에서 참가 인원의 60%가 탈락한다는 미국 네이비씰 특전훈련을 통과한 최초의 여성대원 Lt. 조단 오닐을 연기했다.

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샤를리즈 테론도 유명한 액션 연기자다. 졸리는 <툼 레이더 시리즈>와 <미스터&미세스 스미스(2005년)>, <원티드(2008년)>에서 멋진 액션 연기를 펼쳤고, 테론은 <이온 플럭스(200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년)>, <아토믹 블론드(2017년)>에서 뛰어난 액션 연기를 보였다.

한국에서도 액션 연기에 능숙한 여배우가 여럿 있다. 배우 하지원은 2010년 <시크릿 가든>에서 여자 무술감독을 꿈꾸는 스턴트우먼 길라임 역을 맡았다. 대역 없이 와이어에 매달려 날아오르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탄 채 추격신을 감행했다. 이보다 앞선 2003년 <다모>, 2005년 <형사:듀얼리스트>에서는 검을 잡고 상대방과 대련을 벌였다.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는 배우 수애와 이지아가 첩보요원 역을 맡아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이밖에 배우 최강희와 이나영도 액션 연기를 펼쳤다. 배우 엄정화는 쉰 살이 넘어 <오케이 마담>에서 액션 연기를 했다. 배우 이시영과 김옥빈은 대중의 머릿속에 뛰어난 액션 배우로 기억되고 있다. 여배우 1명이 액션 영화를 이끈다는 건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 액션 연기를 하는 여배우는 적지 않다. 매년 20명 남짓한 여배우 지망생이 액션스쿨에 문을 두드린다. 매일 4시간씩 극한 훈련을 받는다. 발차기, 주먹질, 낙법, 와이어, 레펠 등 액션에 필요한 각종 움직임을 익힌다. 이 중 악착같이 버틴 지망생들은 액션 영화에 대역으로 데뷔한다. 이렇게 남은 국내 액션 전문 여배우는 10명 남짓이다.

<불어라 검풍아>에서 배우 안지혜는 대역 없이 검술 연기를 매끄럽게 선보인다. 액션 장면만 놓고 보면 <검객(2020년)>의 배우 장혁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또 검술만 보면 검술 액션으로 호평을 얻은 <바람의 검심 시리즈>에 견줄 정도로 멋진 액션이 연출됐다. 다만 <바람의 검심 시리즈>의 유명 액션 장면을 흉내 낸 장면이 많다.

제작비가 적은 B급 영화라는 것을 감안해도 배우들의 수준 높은 액션 장면이 <불어라 검풍아>에서 연출됐다. 특히 정해진 합에 맞춰 춤추듯 동작을 맞추는 게 아니라 동작마다 어색하지 않은 움직임이 이어지는 게 눈에 띈다. 액션 연기가 능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경우 동작이 매끄럽지 않아 편집에 의존해 액션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배우 안지혜는 액션 장면을 매우 능숙한 동작으로 연기한다. 사심을 담아 표현한다면 만약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나 DC 확장 유니버스에 동양인 여성 히어로가 나올 경우 배우 안지혜 이상 액션 장면을 연기할 여배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배우 안지혜라면 성별을 떠나 사위어 가는 한국 액션영화를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액션배우를 꼽으라면 배우 마동석이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두께가 20인치에 달하는 팔뚝과 우락부락한 외모는 그만이 가능한 액션을 선보이게 만든다. 때문에 마동석표 영화는 하나의 장르가 돼버렸다. 하지만 쉰을 넘긴 그에게 앞으로도 액션연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배우 권상우도 멋진 액션연기를 펼쳤지만, 그는 액션보다 근육질 몸매와 코미디가 기억에 남는다. 배우 장혁도 액션연기로 유명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액션은 많지 않다. 게다가 동갑인 둘은 50대를 바라보는 나이다. 젊은 배우들 가운데 액션연기에 두각을 보이는 이는 거의 없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액션영화에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만한, 그래서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오고 싶은 영웅상도 거의 없다. <테러리스트(1995년)>의 수현(최민수)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의 우 형사(박중훈), <공공의 적(2002년)>의 강철중(설경구)은 나름대로 매력 있고 액션에도 능한 인물들이지만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영화 몇 편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한국의 액션배우를 대망하는 것은 개인적 선호 때문만은 아니다. 액션은 가장 인기 있는 영화장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코믹스의 영웅을 영화로 옮겨와 프랜차이즈로 대흥행을 구가하고 있다. DC 필름스 역시 코믹스의 영화화를 이어가고 있다. 프랜차이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영화 제작 관습이 아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헝거 게임 시리즈>, <매트릭스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가 모두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할리우드만이 큰돈을 들여 블록버스터를 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할리우드표 프랜차이즈가 남긴 족적은 단순히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프리퀄이 되기도 하고, 아예 이야기를 뽑아 스핀 오프를 만들 수 있도록 팬들에게 감흥을 준다는 것이다.

과거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꽃피운 것은 액션배우들 덕분이었다. 특히 배우 성룡의 코믹 쿵푸영화와 배우 주윤발로 대표되는 누아르는 각각 독특한 액션과 개성적인 주인공을 앞세워 액션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한국의 액션스타를, 한국의 액션장르를 보고 싶다는 것이 부질없는 투정은 아니다. 점차 한국 영화의 관객 동원율이 떨어지고, 마블과 DC의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이 고전적 방식으로는 기술과 자본의 우위, 낯익은 영웅을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를 버티기 어렵다. 프랜차이즈를 제작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대중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