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D-8, 국민은 왕이 될 수 있을까 ‘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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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나 옛날이야기 끝에 클리셰 수준으로 등장하는 관용구다. 영어로는 ‘~and they all lived happily ever after’가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피폐한 현실을 감추려는 어른의 사정 때문에 해피엔딩으로 직결되는 상징적인 표현을 쓴다.

<더 킹(2017년)>의 결말은 권선징악이다. 선한 자는 성공한다. 착실한 최민석 검사(최귀화)는 부장검사로 승진, 유력한 차기 검사장 후보로 떠오른다. 감찰부 안희연 검사(김소진)는 좌천됐다가 여성 최초로 감찰부장이 된다. 반면에 악한 자들은 몰락한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검사 한강식(정우성)은 실형을 살면서 우울증과 공황 장애을 앓는다. 양동철 검사(배성우)는 지방으로 좌천된 뒤 음란행위를 하다가 적발된다. 권력에 힘입어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들개파는 와해된다.

박태수(조인성)는 애매하다. 강식의 밑에서 적잖이 비리를 저질렀던 그는 재기에 성공한다. 태수는 강식에 의해 제거당할 뻔한 뒤 그에게 맞서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결과를 알려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나고 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선되었냐고? 떨어졌냐고? 그건 나도 궁금하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니까. 당신이 이 세상의 왕이니까.”

영화 제목에서 말하는 <더 킹>은 유권자를 뜻한다. 영화는 태수의 인생역정을 보여주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당선 여부가 아니다. 태수가 정치인이 된 이유는 강식에 대한 복수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잃은 태수가 정치에 뛰어들려고 마음먹을 때 떠올린 건 “정치가는 받은 만큼 보복을 한다”는 강식의 말이다.

양아치였던 고등학생 태수가 검사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정치 검찰이 된 것도 정의감과 거리가 멀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강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의 비리 고발 역시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였다. 죄책감을 느낀 건 잠시 동안에 그쳤다.

태수는 개과천선한 게 아니다. 건달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하게 자랐으나 노력해 법대에 진학한 것으로 진실을 조금 비틀었다.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겪은 운동권 출신으로 둔갑했다. 검사가 되어 조직의 비리를 직접 경험하며 목격하고 양심에 못 이겨 이를 폭로한 후보로 실체를 왜곡했다.

과연 권력의 꽁무니를 쫓던 정치 검찰의 하수인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할까, 강식의 자리에 앉게 된 민석과 감찰부장이 된 희연이 초심을 잃지 않고 검찰 본연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할까. 안타깝지만 현실은 동화나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권자가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게 일생일대의 목적인 정치인 따위가 국가의 주인이 아니다. 이윤 극대화를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기업의 수장도 아니다. 과거 자신을 희생해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이들도 아니다.

피땀 흘려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그 영광을 독재자들과 독재자의 딸에게 돌리는 노인들과 은퇴를 앞두고 청년의 눈치를 보며 노후를 보낼 걱정인 정년퇴직자, 열심히 땀 흘려 일해도 집 한 채 사지 못하는 암울한 청년들이 주인이다. 해피엔딩은 국민의 몫이다.

하지만 2022년 3월 9일의 주인공은 14명의 대통령 후보 중 누군가가 될 것이다. 조연은 그가 속한 정당과 보은으로 요직에 앉게 될 조력자들이다. 단역은 선거 결과로 희비가 엇갈리고 조롱과 비하하는 지지 세력이다. 어디에도 평범한 국민의 자리는 없다.

역대 선거에서 겨우 투표율 80%를 넘긴 한국은 투표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가장 중요한 권리이자 책임으로 여긴다. 투표란 국민 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호감이나 비호감으로 갈라 해석할 영역의 것이 아니다.

투표가 중요하지만 투표 이후 역시 중요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지지하는 정당을, 대선후보를 거리낌 없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거 때문에 특정지역과 연령층을 줄곧 비방해왔다. 우리끼리 싸울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