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d by Amazon Polly

[편집자주]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전면 폐지하고 원전 최강국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다. 기후 위기와 원전 안전에 대한 불안감 속, 어떤 이는 원전이 답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답이 아니라며 대립한다. 하지만 양쪽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한 문제가 있다. 핵폐기물이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영구처분장은 90년대부터 줄곧 입지 선정을 시도했으나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전 지구적으로 아직 영구처분장을 마련한 곳은 없다. 무작정 원전 부지 내에 임시로 쌓여만 가는 핵폐기물. 답을 내야 할 정치인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하길 꺼린다. 한국 원전 가동 40년, 진척 없는 빨간불만 이어지고 있다.

① 응답 없는 정치, 불안한 주민
“고준위 방폐장, 답 있다는 사람에게 속지마라”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실패의 역사
④ 월성원전 인접지 주민에게 방폐장이란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장 입지 선정 문제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회 갈등을 초래했다. 폐기물을 10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특성 때문이다. 정부는 1980년대부터 국내에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려 했으나 8차 시도까지는 실패했다.

정부는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를 먼저 선정하기로 하고 신청 지자체를 대상으로한 주민투표 끝에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을 확정했다. 경주 지역민들이 중저준위 방폐장을 수용한 데에는 고준위 방폐장은 같은 지역에 두지 않는다는 법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한 지역에는 고준위 방폐장을 지으면 안 된다.

중저준위 방폐장 입지 선정 이후에도결국 고준위 방폐장 입지는 2022년 지금까지도 여전히 선정하지 못한 상태다. 원전 부지 내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쌓아두는 동안, 월성원전에는 사용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 저장률이 2021년 한때 99%에 육박했다. 2022년 3월 임시보관시설인 맥스터를 추가로 7기 더 증설하면서 저장률은 떨어졌지만, 임시 조치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은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여서, 정부 입지 선정 실패 사례를 되짚어 보고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1989년 1차 시도 : 울진, 영덕, 영일

정부는 1983년 원전 부지 외부에 방폐장을 따로 건설키로 하고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중저준위폐기물은 지중매몰식으로, 사용후 핵연료는 중간저장시설을 우선 건설해 별도 관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은 부지환경현황조사 용역을 한국전력기술에 의뢰했고, 노태우 정부에서 1988년 11월 울진, 영덕, 영일 3개 지역을 후보지로 정했다. 1989년 2월 임시국회에서 영덕 지역 국회의원인 황병우 국회의원(민정당)이 후보지 선정과 관련해 언급하자 선정 사실이 알려졌고, 주민 반발이 시작됐다.

영덕 주민들은 비밀리에 사업이 추진된 점에 분개했는데, 애향 단체인 영덕회를 중심으로 대책위가 구성됐고 궐기대회, 국도 점거 등 반발이 터져 나왔다. 1989년 4월 7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황병우 의원이 방폐장 철회 촉구 이후 방폐장 반대운동이 시작됐다. 이에 경북도지사와 군수가 나서서 주민을 달랬으나 시위는 군 전체로 번져갔고, 결국 지질조사가 중단됐다.

▲”영덕 浦口(포구) 휩쓰는「核(핵)쓰레기 공포」”, 조선일보, 1989.4.7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1990년 2차 시도 : 안면도

1차 시도 실패 후 노태우 정부는 충청남도와 한국원자력연구소 간 협상 과정 등을 3급 비밀로 분류해 비밀리에 입지 선정을 진행했다. 정부는 안면도에 서해과학연구단지를 조성하고 방폐장 구실을 할 원자력 제2연구소를 완공하기로 했는데, 주민들은 불신을 키워 가다 격렬히 반발했다.

1990년 11월 9일자 <한겨레>에 따르면 주민과 학생 1만여 명이 서산경찰서 안면지서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고 안면 읍사무소를 점거했다. 태안고등학생 600여 명 등 군내 학생 2,0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하고 태안고 운동장에 모여 방폐장 철회를 요구했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정근모 과기처 장관을 경질했고, 김영두 충남도경 국장도 직위해제했다.

■1991년 3차 시도 : 고성, 영양, 울진, 영일, 장흥, 태안, 안면도

3차 후보지 선정 시도부터는 부지 선정 방식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비공개로 먼저 부지 선정에 들어섰던 1, 2차 시도와 달리, 서울대 등 대학의 연구 의뢰를 통해 공개적 절차로 선정 과정을 진행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는 밀실 행정에 대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는데, 정부가 이때 발표한 고성 등 지역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2차 때에도 포함됐던 안면도에서는 한 주민이 양심선언을 통해 원자력연구소가 주민을 금품으로 매수해 처분장 유치 여론을 조성했다고 밝힌 뒤 3차 시도도 무산됐다.

▲””핵폐기물 웬말”분노 후보지 영일군 현장을 가다”, 한겨레, 1992.1.5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1993년 4차 시도 : 울진, 양산

4차 시도부터는 부지 선정 과정의 제도화가 확인된다. 1993년 11월 정부는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의추진및시설주변지역지원에관한법을 제정해 지역발전기금 제공 등 주민 수용성 강화를 모색했다. 또한, 주민 의견 수렴 절차도 규정해 신뢰성 확보도 꾀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은 여전히 격렬히 반대했다. 방폐장 건설 추진 소식에 1994년 5월, 울진에서 후포면청년회 등 시위대 수백 명이 국도를 점거하고 경찰에 돌을 던졌고, 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에 투석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주민을 연행했다. 양산에서도 주민들이 도로 점거, 등교 거부 등을 벌였다.

■1994년 5차 시도 : 굴업도

4차 시도 실패 이후,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1994년 6월 신뢰 강화를 위해 입지 선정 절차를 한전에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추진위원회로 이관해 진행토록 했다. 정부는 공개 절차를 거쳐 인천 굴업도를 후보지로 발표했지만, 주민 반발이 나온 데다가 굴업도 해저에 활성단층대가 발견되면서 무산됐다. 이에 따라 정부 정책 신뢰도도 떨어졌다.

▲”굴업도 핵폐기장”반대”몸살”, 한겨레, 1994.12.23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2000년 6차, 2002년 7차 시도 : 영광, 강진, 진도, 고창, 보령, 완도, 울진

김영삼 정부 말에서 노무현 정부 초기에 이르는 동안, 국가는 사업 방식을 지정고시 방식에서 지역 주민의 신청과 의견을 수렴하는 유치신청 방식으로 바꾸었다. 또한 지원금 증대, 지역개발사업 약속 등 보상책도 강화했다. 그러면서 예비후보지로 정부는 경제성과 지리 조건 등을 따져 영덕, 울진, 영광, 고창 지역으로 좁혔지만 해당 지역 지자체가 유치 신청을 하지 않아 2001년 7월 무산됐다. 이에 공모 기간을 연장하며 양성자가속기 추가 설치 등 지원 계획도 발표했다. 예비후보지로 울진, 영덕, 영광, 고창을 선정했지만, 정작 유치를 신청한 곳은 전북 부안군이었다.

2003년 8차 시도 : 부안군

2003년 김종규 전북 부안군수가 산업자원부에 방폐장과 양성자가속기 유치 신청을 했다. 부안 위도 주민들이 먼저 부안군의회에 유치 청원을 냈고, 부안군의회가 주민 유치 청원을 부결했는데도 김 군수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부안군민들이 크게 반발하며 촛불집회를 시작했다.

이후 7개월여 동안 부안군 주민들이 등교 거부, 차량 시위, 해상 시위 등으로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군수는 주민들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2월 윤진식 산자부장관이 사임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다른 지자체를 상대로 추가 유치 신청을 받기로 입장을 선회했는데, 민심은 식지 않았다. 2004년 부안 주민들은 한국 최초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에는 주민투표법이 시행되기 전이라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주민 91.8%가 반대하는 것으로 확인돼 입지 선정은 다시 백지화됐다.

방폐장 입지 선정 방식을 주민 신청 방식으로 바꾸고, 지원책을 제시했는데도 실패한 점이 주목된다. 노진철 교수는 당시 부안 사태에 대해 “재난의 발생 개연성을 최소화하도록 체계가 발달해도 주민 불안과 관련해서는 공허했다”며 “장기적이고 영원한 재앙의 가능성 앞에서 불안해하는 주민에게 어떤 안전도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부안 방폐장 반대 주민투표(출처=환경운동연합)

2005년 9차 시도 :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입지 선정

부안 사태를 겪은 정부는 2004년 12월 중저준위 방폐장만 따로 건설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또한 2005년 3월 임시국회에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유치지역 지원에관한 특별법도 통과됐다. 정부는 유치 신청한 경주, 군산, 포항, 영덕 중 가장 찬성 투표율이 높은 지역에 방폐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투표 과정에서는 관권 선거 등 의혹이 불거지고 부재자 부정 투표 정황도 드러났으나, 결국 투표 끝에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서게 됐다.

당시 투표에 대해 울산 주민들은 예정 부지(경주 봉길리)가 경주 중심가보다도 울산이 더 가까운 상황에서 경주 시민의 투표로 도입을 결정하는 것은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폐장 입지 선정, 접근법 잘못돼”
입지선정 위해 신뢰성 확보 중요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불신의 제도화 필요”

한국의 방폐장 입지 선정 과정에서 국가 정책 결정과정을 연구한 노진철 교수는 방폐장 입지 선정 시도 실패 요인에 대해 방폐장 건설 문제를 주민 수용성과 경제적 보상의 문제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노 교수에 따르면, 1960~70년대 도농 간 격차가 있고 원전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던 시절 원전에 대해서는 수용성이 높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떠오른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해 주민 반응은 사뭇 달랐다. 위험성에 대한 민감도는 물론, 방폐장의 경우 이로 인한 경기 활성화 등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데다가 장기 보관에 따른 지역 낙후까지 예측하면서다.

또한 원전에 대한 수용성도 스리마일섬 사고(1979), 체르노빌 사고(1986), 후쿠시마 사고(2011)를 거치면서 변화 과정을 겪었다. 원전 사고를 겪은 서구사회에서는 원전 안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지만, 국내에서는 이 과정이 부족했고, 정부도 안전 문제 보다는 경제적 보상을 제시하는 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원전조차 다른 일반적 기피 시설과 다르게 원전이 유발하는 생산성이 없다. 반면 위험은 점점 커진다. 그래도 원전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설이기라도 한데, 방폐장은 그렇지 않다. 10만 년 이상 유지하면서 비용을 들여야 하는 시설이다. 시장성이 없다”며 “서구에서는 안전 확보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안전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했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경주에 중저준위 방폐장이 유치된 것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후쿠시마 사고도 있기 전이라, 위험에 대한 사회적 담론 형성도 부족했다. 그런 상태에서 투표율이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방폐장을 건설하겠다는, 함정을 판 것”이라며 “방폐장이 들어서는 곳보다 넓은 범위인 경주시 전체 의견을 묻고, 더 가까운 지역은 배제했다. 민주주의의 모습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속임수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당면한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에 대해 노 교수는 당국이 인접지 주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짚었다. 이를 위해 노 교수는 정부가 좀더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입지 선정 과정도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언제라도 주민 반대 의견이 높아지면 철회할 수 있는 ‘불신의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노 교수는 “과거의 방폐장 입지 선정 절차는 겉모습만 민주적 절차를 갖는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며 “그런 식으로 주민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끝까지 신뢰 속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언제라도 불신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한 상태에서 주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 조건 속에서만 지역 주민 신뢰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노진철, 「위험시설 입지 정책결정과 위험갈등-부안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입지선정을 중심으로」, 『환경사회학연구 ECO』, 통권 6호, 2004년
이민창, 「유인, 규범, 신뢰할 만한 공약과 정책갈등-정책갈등 유형분류를 위한 시론」, 『행정논총』, 제48권 제4호, 2010년
국회입법조사처,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의 쟁점과 과제」, 『NARS현안보고서』, 제307호, 2017년
“영덕 浦口(포구) 휩쓰는「核(핵)쓰레기 공포」”, 조선일보, 1989.4.7
“고성 양양 울진 영일 장흥 태안 핵폐기물 처분 후보지 선정”, 한겨레, 1991.12.28
“”핵폐기물 웬말”분노 후보지 영일군 현장을 가다”, 한겨레, 1992.1.5
“襄陽군민 核폐기장 반대결의대회 2千여명 國道점거 농성”, 동아일보, 1992.1.6
“안면도 핵폐기장 신청서 조작”, 한겨레, 1993.1.19
“이틀째 격렬시위 울진 核(핵)폐기장 반대”, 동아일보, 1994.5.30
“굴업도 핵폐기장”반대”몸살”, 한겨레, 1994.12.23
“부안 방폐장 원점서 재검토”, 동아일보, 2003.12.11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