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시선 밖 세상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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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전날부터 교통 체증을 겪었다. 안동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하필 집이 대구공항 앞인 탓이다. 설 연휴가 시작하고서는 교통 체증을 겪지 않았다. 목적지인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은 차량 행렬로 산과 들을 가리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아흔을 넘긴 할매 먹거리를 사러 청송군 진보면 면소재지에 들렀다. ‘여자교도소’ 유치를 희망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교도소가 4곳이나 있는 청송군은 인구 감소의 위협 앞에 교정시설 추가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개를 넘어 영양군 입암면 진입로 터널 앞에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다. 갓길에 잠시 서서 현수막을 살폈다. “양수발전소 유치, 군민여러분들이 해냈습니다.” 영양군은 양수발전소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지난해 말 신규 양수발전소 사업자 공모에서 예비 사업자로 선정됐다. 위쪽과 아래쪽에 댐을 하나씩 만들어 특정 시간대에 남는 전력으로 아래쪽 댐의 물을 끌어올려 위쪽 댐에 저장한 다음 전력공급이 부족한 때 수력발전을 돌리는 양수발전을 두고 친환경발전이라는 평가를 한다. 일월면 용화리 일대인데, 전국 최대 용량인 1,000㎿ 규모다. 물론, 댐 건설로 잠기는 마을, 산과 들에 친화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구 1만 5천여 명의,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영양군의 돌파구로 제시됐다.

산과 들을 지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청기면 무진리 외가에 도착해 걷는 것도, 듣는 것도 불편해진 여든일곱 할배, 아흔둘 할매와 저녁을 먹었다. 명절이면 이틀에 한 번 오던 방문요양보호사의 발길도 없어 밥 먹기도 어려울 터인데, 손주 온다고 감주를 내어놓는다. 한학과 불경을 공부한 할배는 이제 생에 더 미련이 없다며 할매와 같이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도,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매일 뉴스를 꼼꼼히 챙겨보고서 메모를 남기는데, 새마을지도자와 민주정의당 지구당 활동까지 했던 할배도 위성정당에 대해서는 혀를 찼다.

▲2월 영양군 청기면 무진리에서 바라 본 밤하늘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3시께 일어나 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된 수비면에 비할 수 없겠지만,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가로등 불빛 하나가 방해해도 개의치 않은 별빛이었다. 멍하니 30분을 쳐다보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눈을 뜨고서 휴대전화를 열어 경북소방 알림방을 보니, 새벽 2시 옆 동네인 청기면 당리 주택 화재 개요가 올라와 있다. 70대 남성 1명이 경상이었고, 목조 3동과 가재도구가 전소됐고, 비닐하우스 2동 일부도 탔다. 명절에도 혼자인 가구는 흔한 일이 됐고, 연휴 새벽에도 소방공무원은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세배를 하고, 차례를 지내러 청기면 산운리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일월초등학교 청기분교가 보인다. 1932년부터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청기분교는 학생 수가 병설유치원생 포함 10명인데, 작은학교에서 아이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아이들은 아궁이 속에 고구마와 밤을 집어넣고 불씨를 살리는데 최선이다. 여름이면 고추 냄새가 가득한 얼어붙은 밭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시의 편리함이 익숙한 몸을 바꿀 수 있을까. 시골과 지역으로 가지 않는 것은 의사뿐만이 아닌데, 지역소멸을 걱정한다지만 농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부박하다고 깔보면서 지역소멸을 막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존중만이라도 가지자고 다짐한다.

늦은 오후 청량산을 넘어 처가가 있는 예천군으로 가는 길, 봉화군에 들어서도 양수발전소 유치를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봉화군도 소천면 두음리와 남회룡리 일원에 500MW 양수발전소 예비사업자로 선정됐다. 봉화군도 인구 감소를 걱정하기는 매한가지다. 예천군 효자면 사곡리 처가로 향하는 길, 은풍면에 양수발전소가 있다. 안개가 잦아 농사 작물이 많이 바뀐 곳이다. 또, 은풍면과 효자면 일대는 지난해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벌어진 곳으로, 아직도 복구가 진행 중이다.

내가 서 있는 시선 밖 세상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0점대 출산율을 근거로 인구감소 지역에서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내놓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들 탓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전국 합계출산율은 0.778, 대구는 0.757, 경상북도는 0.93이다. 양수발전소 건설로 사라지는 산과 들을 아쉬운 일이지만, 사라짐을 걱정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다. 의사들이 농촌으로 가지 않는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농촌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부터 시작할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대도시로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할 것인가. 총선을 앞둔 정치에서도 그렇다. 거대 양당의 정치적 공방에 가려있지만, 몫 없는 이들 곁에서 버텨주는 진보정당의 역할을 살펴볼 일이다. 살아남겠다고 모두 떠나고 나서 뒤늦은 후회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천용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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