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장하성 ‘강남 발언’ 논란 속 배제된 사람들 /김민하

10:34

부동산 문제에 있어선 수도권과 지방의 상황이 워낙 다르다고 하니 지방 사람 입장에선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강남 발언에 대한 논란 얘기다. 그런데 사실 서울 사는 사람도 완전히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싶다.

장하성 실장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다. 강남에 굳이 살 이유가 없다, 내가 살아봐서 안다는 말은 가진 자의 배부른 자랑처럼 들린다. 장하성 실장의 집안은 학자와 관료를 여럿 배출한 명문이고 본인 역시 소액주주운동을 하면서 상당한 자산을 모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청와대 사람들이 강남에 고액 자산을 갖고 있다는 비판은 보수언론이 지난해부터 해왔다. 물론 시기에 따라 비난의 양상은 달라졌다. “다주택자들에게 집을 팔 기회를 드리겠다”며 청와대가 강공을 예고했을 때는 청와대의 다주택자들이 자기 자산은 처분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강요한다고 했다. 강남권이 끄떡 도 안 하는 상황이 펼쳐진 올해 들어서는 청와대의 강남 아파트 소유자들이 자기 재산을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부동산 정책을 만들고 시행한다고 했다. 이런 식이면 이들은 아마 정부가 어떤 정책 카드를 꺼내든 똑같은 소리를 반복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하성 실장은 자기 재산에 대한 자랑이나 셀프-면죄부를 말한 게 아니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는 부동산 정책의 주요 대상이 아니라는 ‘시장 안정용’ 발언을 하려고 한 거다. 종부세를 도입했다가 강남권의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고 대규모 공급확대로 오히려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촉발한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실수요자는 내버려 두고 투기만 잡겠다는 이 정부 정책의 도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다.

더 큰 문제는 이 정권의 정책 지향과 지지층의 성향 사이에 균열이 나타나는 조짐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암호화폐 논란, 유치원 방과후 영어 교육 금지, 삼성증권 유령 주식 사태,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논란, 예멘 난민 문제, 정시 확대를 둘러싼 혼란, 전기요금 누진제를 둘러싼 입씨름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람들의 태도를 상기해보자. 소재는 제각기 다르지만 사람들의 요구는 한 점에서 모인다. 공동체가 내세우는 대의명분에 따른 자원 배분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없으니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시장원리에 기반한 경쟁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장하성 실장의 발언을 통해 하필이면 ‘강남’을 말하는 것에서 비슷한 현상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지 못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고 있다. 어떤 신문은 ‘우울증’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꼭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장하성 실장은 “강남에 삶의 터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는데, ‘강남의 삶’이 가져다주는 이점이란 부동산, 교육, 직장 접근성 정도일 것이다. 직장 문제는 강남 아파트 소유라는 결말로 필연적으로 이어지진 않으니 남는 것은 부동산과 교육이다. 이 두 주제는 ‘미래’와 관련이 있다. 우리 가족과 내 자식의 미래가 부동산 투자를 통한 자산축적과 교육 환경에 달렸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에 근거가 없지 않다. 정부는 ‘생애 맞춤형 복지’를 말하지만, 우리가 늘 맞닥뜨리는 것은 ‘생애 맞춤형 위기의식’이다. 과거에는 큰 일탈만 하지 않으면 자기 삶을 스스로 일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건물주가 되지 않으면 언제든 삶이 파탄 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더 이상 대기업 정규직도 안정적 일자리가 아니다. 이제 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된다고는 하지만 소득 감소의 한 요인일 뿐이다. 여전히 직장은 상사의 갑질과 잦은 야근 및 연장근무 속에 자기 삶을 상실하는 아수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퇴사’는 ‘구원’과 동의어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세상에선 오로지 강남의 부동산 자산을 소유해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장하성 실장의 발언은 그 길을 독점하려 드는 사람의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반발이 원한감정(ressentiment)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게 이유가 있다.

그러나 최종 목표를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은 애초에 이를 꿈꿀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애초에 아파트를 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은 ‘실수요자 보호 논리’가 아니라 세입자 대책이다. 그러나 은행 대출받아 아파트 살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그저 무능력자로 본다. 무능력한 사람은 분수에 맞게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게 시장적 ‘공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전형적 세계관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정권을 붕괴시킨 촛불시위의 중심축 역시 이런 세계관의 소유자들이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이들이 갖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적 의심을 진실로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끝없이 곤두박질치다 4%에 이르게 된 것은 진실이 된 의심이 촉발한 원한감정 아래에 극소수의 기득권을 제외한 대다수의 피지배자들이 하나의 동맹으로 뭉쳤기 때문이다.

이 정권이 국정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당시의 정치적 동맹이 되도록 길게 유지돼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정권 스스로 애초 명분은 명분일 뿐이었다는 식의 냉소적 함정으로 걸어 들어간 탓에 이 동맹은 와해되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이 ‘적폐청산’을 새삼스레 다시 언급하는 건 이런 상황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보복론에 휩싸이며 전임 정권이 저지른 이런저런 불법적 행위를 수사기관의 힘을 빌려 처벌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냉소적 대중은 명분이 아니라 실질을 원한다. 정치란 종종 냉혹한 것이니 이에 부응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대기업에 일자리 창출을 위해 손을 벌리는 게 아니라 고소득층과 고액자산가들을 향한 더 강력한 드라이브를 통해 나머지 계층을 하나의 정치적 동맹으로 묶어내는 게 우선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은 최소화해야겠지만 정 방법이 없다면 고통 분담을 요구하고 설득해야 한다. 비록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를 관철하기 위해서였지만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명분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