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선생의 실천 유학사상은 민족운동·공화주의의 자산이었다”

대경인의협, 계명대 이윤갑 교수 초청해 '심산 김창숙'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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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15:09 | 최종 업데이트 2019-03-07 15:19

"헛되게 옛것에 구애되어 진부한 소견을 지키며 일편 되게 침체한 지식에 안주하는 것을 매우 깊이 반성해야 한다" -<국역 심산유고> 중-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던 경북 성주의 유학자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운동가, 민주화운동가였다.

6일 오후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계명대 이윤갑 교수(사학과)를 초청해 '심산 김창숙 선생의 실천적 유학 사상과 민족운동'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계명대 이윤갑 교수(사학과)

이윤갑 교수는 "김창숙 선생은 실천적인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평생을 살았다"며 "그의 실천적 유학사상은 자주적 국가를 만드는 민족운동, 공화주의를 만드는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창숙은 1919년 3월 1일 종교계 중심의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발표 후, 전국의 유림을 모아 '유림단독립선언서'를 준비한다. 그는 유림 137명이 서명한 선언서를 들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번역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다. 선언서는 각국 대사관과 국내 향교 등에도 전해졌다. 바로 '제1차 유림단사건' 또는 '파리장서운동'이다.

그해 4월 2일 경북 성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종교계 인사가 주도한 서울 등 다른 지역 만세 운동과 달리 유림이 파리장서운동을 알리고자 주도했다.

이윤갑 교수는 "유림단독립선언은 유교 나라 조선의 중심인 유림 또한 독립을 강렬히 열망하고 있음을 세계와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다"며 "심산은 대의명분과 시의성을 꿰뚫고 있었다. 이는 곧 유학의 '인욕을 막아서 천리를 보존함(遏人慾存天理)'을 실천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김창숙은 1925년 독립기지건설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생각보다 자금이 모이지 않자, 김구 등과 의논해 의열단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1926년 12월 28일)를 계획한다. 이를 도와 모금 운동을 한 유림 600여 명이 투옥되는데 '제2차 유림단사건'이라 불린다.

1927년 김창숙 중국의 한 병원에서 치료 중 일본에 발각돼 국내로 압송됐고, 징역 14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됐다.

해방 후, 김창숙은 건국 운동에 나섰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남한의 단독 총선거 반대 선언에도 참여했다. 이 와중에 김창숙은 일제강점기 경학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성균관을 복구하고, 근대적 대학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1951년 이승만 정권에 '하야경고문'을 보내 40여일 간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1962년 5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윤갑 교수는 "그의 학문은 언제나 사회적 해결이 절실한 과제와 당면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의 유학적 탐구는 항상 실천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며 "심산의 민족운동과 사회적 실천이 역사의 진보에 기여했던 것은 실천에 임하는 그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평가했다.

한편, ‘성주 파리장서, 4·2성주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오는 4월 2일 경북 성주군 성주전통시장 일대에서 성주 만세 운동 재현 행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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