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범죄자 얼굴 공개, 책임을 가리다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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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15:32 | 최종 업데이트 2019-06-10 16:18

어느 여성이 전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잔혹한 시신 훼손에 분노한 여론에 경찰은 이 여성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성의 정확한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이 여성이 언론 카메라 앞에서 긴 머리 등을 활용해 얼굴을 가리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법은 수사기관이 피의자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 구체적 방법이 있어서는 근대적 법체계의 한도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과거처럼 죄인에게 칼을 씌우고 머리채를 잡아 들어 강제로 얼굴을 보여주는 식의 방식을 취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신상 공개라는 의미는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고, 범죄 예방에 기여하는 등의 공익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얼굴을 강제로 공개하도록 할 것인가 여부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피의자가 ‘꼼수’로 제도를 무력화한 것처럼 되면서 비난 여론은 배가 되었다. 결국 남편을 살해한 이 여성의 얼굴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받기 위해 이동하던 과정에서 카메라에 찍히면서 언론에 의해 공개됐다. 곧이어 머리, 표정은 어쨌다는 둥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쯤되면 우리가 왜 이렇게 얼굴에 집착하는지를 따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근대적 지식은 사람을 생김새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가 되지만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선 오히려 한 사람의 삶이 얼굴에 새겨진다는 미신적 믿음을 용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삶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믿음은 우리가 특정한 개인의 본질을 본인의 주장이나 어떤 공식적 기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어떤 불신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범죄자가 그야말로 범죄자에 어울리는 흉악한 외모를 하고 있다면 역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외모였다는, 사후적 예언과 같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역시 얼굴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범죄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이 불신의 법칙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얼굴 생김새와 범죄는 관련이 없다는 합리적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라며 비범죄적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범죄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인물의 경우 외모로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를 범죄자 신상공개 문제와 같이 보면 어떨까? 결국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예외적 성격을 강화시켜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외모와 행동이 일치하는 경우 바로 이 ‘행동’에 해당하는 일은 범죄와 같은 예외적인 것이 된다. 외모가 행동과 불일치하는 경우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또다시 예외적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이를 뒤집으면 사람들이 범죄자의 외모를 특별히 궁금해 하는 것은 범죄와 범죄자라는 존재의 예외성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는 끔찍한 것이라는 점에서 여기서의 예외성은 괴물성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괴물’을 다루는 방식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퇴치함으로써 일상의 복원을 시도하는 것이다. 사건 사고를 다룬 기사에 용의자를 당장 사형시키라는 댓글이 많이 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사기관이 잔혹한 범죄에 대해 피의자의 신상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이런 대중의 여망에 부응함과 동시에 끔찍한 범죄로부터 일상을 복원한다는 환상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결론도 가능하다.

범죄자 신상 공개에 대한 여론에서 또 하나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얼굴 공개 자체를 이해득실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범죄자는 잘못을 한 만큼 앞으로의 인생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얼굴’의 공개는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 ‘범죄자’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게 공개된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상당한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얼굴 공개는 범죄자를 향한 일종의 ‘페널티’이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 우리가 ‘헬조선’이라며 자조하는 대상과 상당 부분 닮아있는 듯 보인다. 끝없이 경쟁하는 이 사회에서 손해를 강요당하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도태 혹은 제거의 대상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된다. 이 질서를 내면화한 결과가 앞서 언급한 이해득실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 안에서는 잘못을 행한 사람에 대한 징벌로서 얼굴 공개라는 ‘손해’의 강요라는 ‘룰’은 반드시 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앞의 남편을 살해한 여성이 스스로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도록 한 것에 대해 ‘형평성’ 시비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범죄와 범죄자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수하다기보다는 보편적이다. 신상 공개의 경우 애초의 취지는 범죄자에게 어떤 책임을 지우고 ‘손해’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사회에서의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범죄와 범죄자를 재빨리 제거하거나 이들을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는 틀에 우겨넣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범죄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여론에 편승해 책임의 무게를 줄여 보려고 하는 공권력의 시도나 범죄자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면 사실상 얼굴을 공개할 수 없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어떤 보완을 요구하는 언론의 태도 모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사건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범죄가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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