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홍콩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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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4:17 | 최종 업데이트 2019-06-17 14:18

“범죄인 인도법”에 반발한 홍콩 시민들의 시위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주최 측이 밝힌 참가자 수는 100만.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라고 한다. 기세에 눌린 홍콩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해서 법안 제정을 잠정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완전 철회까지 지도부는 시위를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2014년 우산혁명에 참가해서 점거 운동을 펼쳤던 예술가들과 학생들이지만, 이른바 직장인들도 대거 참가해서 흡사 한국의 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갈수록 심화된 홍콩의 빈부격차가 시위 참가자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는 진단도 없지 않다.

100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인 그날, 마침 나는 홍콩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학술대회장을 빠져나가서 목격한 시위대의 모습은 상당히 고무된 분위기였다. 2014년 우산혁명의 열기가 잠잠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캐리 람 신임 행정부는 지도부를 기소해서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내가 우산혁명 직후 타이완 학술대회에서 만난 지도부 중 한명도 그때 구속되어 그를 초청했던 학자들과 함께 탄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홍콩 시위는 “범죄인 인도법” 제정을 통해 촉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캐리 람 행정부의 행태에 대한 분노가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홍콩 100만 시위를 평가하는 입장들은 제각각이지만, 한국의 경우 녹색당과 바른미래당, 그리고 심지어 유튜브 보수논객들까지 동시에 홍콩시위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에서 이 문제가 놓인 지형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번 시위가 홍콩이라는 도시의 탄생 이래 최대의 사건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말을 자세히 뜯어보면, 홍콩은 지금이나 과거에나 민주주의의 가치가 지배적인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 홍콩시민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미래형이지 과거형이나 현재형이 아니다. 홍콩시민에게 민주주의는 빼앗긴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 나가야하는 과제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과거 홍콩을 지배했던 영국을 비롯한 이른바 ‘서방 세계’가 홍콩 행정부와 중국 정부를 향해 근엄하게 홍콩시민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라고 훈수를 두는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중국으로부터 무단으로 홍콩을 강탈해서 식민화하고 총독을 파견해서 통치했던 이들은 오늘날 홍콩 문제의 기원을 만들어낸 당사자에 불과하다. ‘서방 언론’이 진정 홍콩의 민주주의를 걱정한다면, 이런 자국의 식민통치역사부터 알리고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홍콩시위에 미국의 사주를 받은 배후세력이 있고 ‘서방 세계’의 이해관계를 위해 중국 정부를 흔들기 위한 목적으로 시위를 선동하고 있다는 음모이론을 흘리기도 한다. 세계금융자본이 몰려 있는 홍콩에 친미세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의사표현이라는 것이 일부 단체의 선동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역사적 진실이다.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미 폭정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그에 반발하는 러시아 인민의 분노 역시 극에 달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이번 시위의 기저에 깔린 것은 우산혁명에 대한 탄압이라는 정치적 갈등이다. 이 모순의 갈등이 없다면 설령 일부 친미단체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효과적인 선동을 한다고 한들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오의 말처럼, 모든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 이 원리는 홍콩시위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반항의 이유는 기존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 터이다. 역사의 진실이 말해주듯, 정치적 대중은 반드시 올바른 슬로건을 내걸고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산혁명부터 이번 시위까지 자신들을 중국인이 아닌 홍콩시민으로 명명하고 있는 이들이 요구하는 홍콩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넘어야할 산이 많다. 이 문제가 홍콩 자본주의의 모순을 형성하고 있는 계급 불평등의 문제로 확장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라는 의제는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구상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더 상황은 난망해질 것이다. 이른바 한국의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은 상당 부분 윌슨 이후로 지속되어온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수혜 덕분이었다. 국제사회가 감시의 기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아이러니하지만 한국의 미국 의존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주는 행보는 이런 국제주의의 잠정 폐기와 그 이전의 고립주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미중무역분쟁은 바로 이와 같은 미국의 선택을 암시하는 징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얼핏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신냉전의 기류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지금 중국은 과거의 소련이 아니고, 이 체제도 두 개의 태양이 비추던 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양극체제라기보다 단일한 무역 네트워크로 통합된 하나의 경제체제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대외무역의존도가 미국보다 중국에 훨씬 더 치우쳐 있다.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 시기는 정치적 명분을 통한 편 가르기가 가능했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소련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정치이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훌륭한 성공사례일 텐데, 이 역시 80년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그리고 그에 이어진 노동자대투쟁 같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달성한 민주주의가 만들어놓은 세계가 홍콩 못지않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홍콩시민이 쟁취해야 할 민주주의의 문제는 한국이라고 해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 아니다. 홍콩이나 한국이나 다 같은 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다. 홍콩 시위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해서 한국은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홍콩은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홍콩 100만 시위는 우리의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기에 작동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제도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통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잘못되었다’는 익명의 목소리가 다시 거리를 가득 메우게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 내장되어 있는 평등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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