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82년생 김지영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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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10:14 | 최종 업데이트 2019-11-04 10:15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가하러 온 길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에 들른 “부광”이라는 북카페에서 중국어로 번역되어 진열된 <82년생 김지영>을 발견했다. 재고가 다 나가서 달랑 한 권만 남았는데, 북카페 주인은 더 주문해서 가져놓을 예정이라고 전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상영 중이라고 하니, 그 카페에서 페미니즘 독회를 꾸리고 있는 타이완 지인은 개봉하면 보러 가겠다고 눈을 반짝인다.

타이완은 한국보다 여권에 대한 인식이 높은 곳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한국의 <82년생 김지영>에 공감의 지지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문학으로서, 그리고 영화로서 <82년생 김지영>이 내포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런 반응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작품에 대한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비평들은 많이 제출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덧붙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새로운 ‘참여문학’의 출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특히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목격하는 현상들은 이 영화의 완결성과 무관하게 텍스트의 정치성과 관련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여성관객들의 존재는 이 영화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실체적 조건이기도 하다.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극장을 찾는 경우가 많은 한국 영화시장의 특성에 비추어본다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를 둘러싼 ‘연대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주인공 김지영은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여성 모두이기도 하다. 이런 변증법적인 인식의 지점에서 “나이자 곧 우리이고 우리이자 곧 나“라는 보편적 정치성이 출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이 겪는 차별의 에피소드가 평면적이라는 지적은 이런 면에서 너무 작품 내적 논리에 치중해서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평면성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차별과 비하의 일상화라는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 입체감으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의 회색이 여성이라는 존재적 현실과 마주하면서 총천연색으로 리바이벌되는 셈이다.

이런 형식의 전환은 확실히 흥미로운 것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82년생 김지영>이 2019년에 던지는 화두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영화화되면서 등장한 ‘악플’이나 ‘별점테러’는 이 작품이 현실적 파급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악을 논하는 윤리의 문제는 심리적인 판단의 영역을 항상 감추고 있다. 자기 판단을 하지 않는 악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처럼 진화한 기계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대체할 것이라고 하지만, 기계가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욕망’을 가져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상상은 기계도 인간처럼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상태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욕망‘은 결코 남의 명령에 따르거나 그 남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남과 단절하면서 발생하는 것이 욕망이다. 내가 남과 같지 않다는 각성의 트라우마를 갖는 순간, 우리는 그 불가능성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각성의 트라우마가 ‘자유’라고 불리는 어떤 상태를 빚어낸다. 물론 이 ‘자유’는 결코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82년생 김지영>이 관객들에게 다가가 ‘되먹임’되는 과정을 이런 ‘욕망’의 논리에 근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이 현실의 모방이나 반복으로 다가오는 순간, 관객들은 돌연 그동안 몰랐던, 또는 설령 경험하고 있었지만 인식할 수 없었던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이 묘사하는 차별의 에피소드를 현실에서 겪은 이들에게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은 그 기억의 트라우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환기시킬 것이고, 젠더에 따른 차별을 현실에서 겪은 적이 없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그동안 몰랐던 ‘여성’의 존재를 부각시킬 것이다.

그 ‘여성’이 자신이든, 아니면 자신일 수 없는 ‘낯선 존재’이든, 이렇게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과 조우한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이 발견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전자라면 공감의 눈물을 쏟을 것이고, 후자라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성들’을 호명해서 그 에피소드의 평면성을 지적할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여성’은 불려 나오고, 각자의 선택을 요청받게 된다. 물론 이런 강제적 상황을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이 불쾌하다고 ‘악플’과 ‘별점테러’를 하는 행위는 자기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82년생 김지영>의 약진은 지금까지 비평에서 논의해온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한때 작가와 독자의 역할을 두고 갑론을박했던 옛 논쟁들을 21세기로 호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국경을 넘어선 이 확장성이야말로 특정한 텍스트가 ‘정치성’을 획득하는 방식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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