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베르테르 효과’가 아니다 / 김자현

10:42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난 24일, 구하라 씨가 떠나고 가장 많이 한 일은 사람들의 울분과 고통과 슬픔을 읽는 것이었다. 수많은 말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는 베르테르 효과 따위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다’였다.

베르테르 효과는 미디어의 자살보도에 항상 따라붙는 꼬리표 중 하나다. 유명인이 사망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말한다. 유명인의 죽음이 일종의 ‘트리거’가 된다는 논리다. 유명인의 죽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 보도이므로, 결국 슬픔을 전염시키는 매개가 뉴스가 되는 셈이다. 자살 사건마다 언론의 자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구하라 씨의 죽음에 대한 무성의한 보도 때문에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날 것이 우려되므로 언론이 보도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과, 구 씨의 죽음이 베르테르 효과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구하라 사망, 설리 따라갔나… “베르테르 효과 우려”> 따위의 헤드라인을 보고 사람들이 격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렇게 적으면 마치 고인을 가장 크게 고통스럽게 한 것이 그 스스로의 슬픔인 것처럼 보인다.

고인의 마음은 결코 가늠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 그를 괴롭힌 것을 찾으려면 친구를 잃은 슬픔보다 사회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그에게 슬픔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한 친구의 죽음도 결국 사회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구하라 씨는 살아생전 삼중고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언론과 대중과 사법부가 차례로, 때로는 다 같이 그를 괴롭혔다.

구하라 씨의 전 연인이었던 최종범 씨와 폭행 시비가 불거지면서 구 씨는 대중과 언론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그는 그 과정에서 연인과 다투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것은 물론, 성관계 영상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불법촬영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를 밝히길 두려워했던 그의 걱정 그대로, 당시 실시간 검색어 1위는 ‘구하라 동영상’이 차지했었다. 그 검색어를 받아 쓴 기사의 헤드라인 역시 여기 언급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저열했다. 대중과 언론이 그렇게 잔인했다.

최소한의 보호를 바라고 섰을 게 분명한 법정에서도 구하라 씨는 상처 입어야만 했다. 지난 8월, 1심 재판부가 최종범 씨를 상대로 재물손괴, 협박, 강요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으나 불법 촬영 혐의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위해서 법정에서 당시 부장판사가 ‘영상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파악된다’며 굳이 영상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파란이 일었다. 당시 구하라 씨 측이 ‘2차 가해’를 우려해 동영상 공개를 거부했음에도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한 판결을 위한 일이었다고 해도, 피해자를 조금도 보호하지 않는 행동이었음은 확실하다.

언론은 유명인 사생활 보도에 대한 최소한의 금도도 지키지 않았고, 대중은 연예기사 댓글란에 막말을 쏟아내며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사법부는 피해자를 법정에서 보호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하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윤리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것이 살아생전 그를 고통으로 옥죈 것이다.

살아생전의 그의 고통은 최소한의 정의도 지키지 않은 우리에게서 왔다. 살아생전의 그는 우리에게 “한 번이라도 예쁘게 봐달라”고 했지만, 그의 고통은 우리가 그를 예쁘게 봐주지 않는 데서 온 게 아니다. 우리가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한 사람이 온당하게 누려야 할 1인분의 인권을 다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고통받은 것이다.

<구하라 사망, 설리 따라갔나… “베르테르 효과 우려”>라는 제목을 달았던 기사는 사람들의 비판에 직면하자 금세 삭제됐다. 그를 가장 절망케 했을 슬픔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가 ‘베르테르 효과’ 때문에 떠났다고 말해선 안 된다. 남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