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새로운 100년 맞는 한국 영화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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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09:37 | 최종 업데이트 2020-01-15 09:38

한국 영화 100주년이었던 2019년은 한국 영화계의 위기가 한층 더 짙어진 해였다. 일부 언론에서 천만 영화가 5편이나 나왔고, 역대 연간 최대 관객 수를 기록한 뜻깊은 해라고 추켜세우지만, 자조(自照) 없는 평가는 동의할 수 없다. 단지 국내 영화 성적이 여러모로 기대에 못 미쳤다는 이유가 아니다.

지난해 극한흥행을 이뤄낸 <극한직업(1,626만 명)>과 <기생충(1,008만 명)>, <엑시트(942만 명)>은 모두 스크린 독과점 때문이 아니라도 관객을 끌 만한 매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 영화는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했다. 심지어 관객들에게서 조롱과 비하에 시달린 영화도 많다.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연평균 4.2회로, 아이슬란드에 이어 세계 2위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관객들은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응원했다. 역대 천만영화 27편 가운데 한국 영화의 비중은 19편(70.1%)에 달한다. 한국 영화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면 열렬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던 한국 관객들이 한국 영화에 등을 돌린 이유가 뭘까?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영화 산업이 갑자기 추락한 것일까, 한국에서 월트디즈니컴퍼니가 만든 영화를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열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 관객이 전 세계에서 유독 까다로운 걸까.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외면은 늘 캐스팅되는 톱 배우, 늘 반복되는 대중적 코드가 섞인 영화를 보는 관객의 피로감이 커진데서 출발한다. 그간 한국 영화의 장르는 특정 장르에 편중됐다. 조선일보가 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와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스크린을 1천개 이상 차지한 영화를 살펴본 결과, 드라마와 코미디, 액션, 범죄, 스릴러에 쏠려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 판타지, SF, 어드벤처물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이는 안일한 흥행 공식에 기대어 흥행을 거둔 특정 장르를 유독 많이 만들었다는 얘기다.

한국 영화계에서 ‘뻔한 얼굴에 뻔한 이야기’로 이미 본 것 같은 영화를 기계적으로 찍어내자, 관객들은 기시감과 진부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간 국내 극장가는 독특한 장르나 작품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각본과 연출보다는 손익분기점에 맞추기 위해 대중적 코드에 영화를 끼워 맞춘 각본과 연출로 버무려진 영화 일색이었다. 제작사들은 50억 원짜리 영화 10편을 제작하기보다 100억 원짜리 5편을 만드는 것을 선택해왔다. 장르를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낸 저예산 영화나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는 주류 배급사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

2020년은 한국영화에 더 높은 파고가 닥쳐올 것이다. 올 초 인기 캐릭터 할리 퀸을 원톱으로 내세운 <버즈 오브 프레이>와 호평 받은 <원더우먼(2017년)>의 속편 <원더우먼 1984>,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는 <블랙 위도우>와 <이터널스>를 연달아 개봉될 예정이다. <엑스맨> 시리즈 스핀오프이자 호러 영화인 <엑스맨:뉴 뮤턴트>, <킹스맨> 시리즈의 프리퀄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스파이더맨을 대표하는 두 악당 베놈과 카니지가 등장하는 <베놈2>도 개봉한다.

디즈니 실사영화 <뮬란>과 인기 호러영화 <컨저링3>, <콰이어트 플레이스2>와 <배트맨 시리즈>, <인터스텔라> 등으로 한국 관객에 사랑받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국제첩보물 <테넷>도 스크린에 오른다. 연초에는 아이언맨으로 큰 사랑을 받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한 <닥터 두리틀>이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런 막강한 외화들 사이에서 한국 영화가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을까. 물론 기대되는 한국 영화들도 있다. <부산행(2016년)>의 속편 격으로 4년 뒤 폐허가 돼버린 서울을 배경으로 한 <반도>와 조선 최초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 <자산어보>, 우민호 감독이 동명의 소설을 각색, 연출한 <남산의 부장들>이 있다. <파수꾼(2011년)>의 윤성현 감독이 9년 만에 내놓은 신작 <사냥의 시간>과 스쿠버다이빙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스릴러 <디바>도 기대되는 영화들이다. 총제작비 240억 원, 순제작비 약 160억 원, 순제작비 150억 원대 SF 블록버스터들도 있다.

하지만 연초부터 인기 웹툰 원작의 인기에 기댄 것으로 보이는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하고, 유명배우를 내세운 뻔한 코미디물도 여럿 극장가에 등장할 예정이다. 아직도 수년 전 흥행 공식에 맞춘 영화들도 눈에 띈다. <자토이치(2003년)>와 <이치(2008년)>가 떠오르는 맹인 검객 이야기 <검객>과 <아일랜드(2005년)>와 <제미니 맨(2019년)>, <레플리카(2018년)>등 수없이 영화화된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복>이 대표적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는 2004년 <문학과 사회> 기고에서 “블록버스터 운운하는 한국 영화계는 일종의 모순, 자가당착, 아니면 교묘한 환상의 그물에 갇혀 있다”면서 “거대 마케팅과 배급 물량 공세 등으로 대중의 관심 독점에 사활을 거는 체제 속에서 저예산 영화마저 주류 영화 못지않은 마케팅 비용을 치르며 개봉해야 하는 웃지 못할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 씨 역시 같은 해 저서 <한국의 영화학을 만들어라>를 통해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는 논리로 한국의 블록버스터와 스크린 독과점을 꼬집으면서 이런 현실이 영화의 다양성을 죽인다고 개탄했다. 이들이 오명과 힐난을 무릅쓰고 쓴소리를 내뱉은 이유는 먼 훗날 예상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16년이 지난 뒤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고 있다. 올해도 ‘안전한 성공’만을 추구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천만 영화는 몇 편이나 나올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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