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엔니오 모리꼬네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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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한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말이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데뷔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남녀가 찾은 ‘첫눈에 빠진 사랑’의 실마리는 고작 ‘똑같이 왼쪽 발가락에 난 점 두 개와 똑같은 뒤쪽 어금니의 충치’ 정도다. 누군가에게 왜 한눈에 반할까. 상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랑을 호르몬의 분비만으로 납득할 수 있을까?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륙해 호주로 향하던 여객기가 폭풍우에 요동을 친다. 남태평양 상공을 날던 여객기는 엔진 고장으로 외딴섬에 비상 착륙한다. 승객들은 근처를 지나던 러시아 여객선으로 갈아탄다. 이 여정에서 승객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과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는 사랑에 빠진다.

마이크는 은퇴한 풋볼 쿼터백 스타 출신으로 유명한 플레이 보이다. 토크 쇼 진행자 린 위버(케이트 캡쇼)와 약혼을 발표해 연예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는 같은 여객기에 탄 테리를 보곤 첫눈에 반해 작업을 건다. 테리는 뮤지션이었지만, 증권가 사장인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꿈을 포기했다. 현재는 약혼자의 지원 속에 인테리어를 배운다.

테리와 마이크는 선상에서 보내는 사흘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테리는 처음에는 마이크의 구애를 외면하지만, 점점 마음을 열어간다. 선상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됐을 때는 마이크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때 마이크는 테리와 동질감을 느낀다. 단순한 호감이 사랑으로 번지게 된 계기다.

타히티 섬에 여객선이 정박할 때 마이크와 테리가 근처 모오레아 섬의 친척에게 들를 때 둘의 감정이 깊어진다. 모오레아 섬은 천국처럼 아름다운 산중 초원이 펼쳐져 있다. 초원을 산책하던 둘은 한적한 집에 들어선다. 거실에서 친척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테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덧 둘은 서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별이 아쉬웠던 마이크는 “자신을 가린 치장을 정리할 테니 기다려 달라”며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 그러면서 3개월 뒤인 5월 8일 오후 5시 2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 후 테리는 음악을 다시 시작한다. 유치원 음악 교사가 되어 마이크와 재회를 기다리며 설렘 속에 살아간다. 마이크 또한 연인 린 위버와 헤어진 뒤 본업인 풋볼 코치의 삶을 살아간다. 드디어 기다리던 재회의 날이 다가왔다. 마이크를 다시 만날 생각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들뜬 테리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를 모르는 마이크는 전망대에서 밤새 테리를 기다린다.

사고로 불구가 된 테리는 마이크를 피하지만, 마이크는 끝내 테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유명한 엔딩이 이어진다. <러브 어페어(1994년)>의 이야기다. 주인공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은 실제 부부 사이다. 둘은 <벅시(1991년)>를 함께 촬영한 이듬해 결혼했다.

<러브 어페어>는 현존하는 모든 멜로 영화의 원천으로 통한다. 연인 사이의 잔잔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도,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러브 어페어>를 최고의 멜로 영화로 꼽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 내용보다 여운이 깊은 음악 때문이다.

▲엔니오 모리꼬네(사진=flickr.com)

러브 어페어의 OST 피아노 솔로(Piano Solo)는 영화음악의 거장 고(故)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했다. 피아노 솔로는 마이크가 테리를 데리고 간 모오레아 섬 친척이 둘에게 들려주던 피아노 연주곡이다. 피아노 솔로를 들으면서 감동한 것은 테리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속 음악은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풍성하고 뚜렷하게 전달한다. 그래서 음악은 영화와 떼어낼 수 없다.

지난 5일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평생 음악으로 영화를 들려주고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192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재즈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했고, 이탈리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음반 회사에서 편곡자로 활동했다.

그의 삶을 바꿔놓은 건 1955년 영화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다. 500편이 넘는 작품의 음악을 만들었고, 20세기 영화 음악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클래식과 록, 컨트리, 재즈, 전자음악 등 수많은 요소들을 결합하면서 음악적 실험을 이어 나갔으며, 아름다운 선율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영화 음악이 영화에 포함된 하위 장르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별개의 예술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그는 평범한 영화를 꼭 봐야 할 작품으로, 좋은 영화를 예술로, 위대한 영화를 전설로 만들었다“고 했다. 엔니오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은 엔니오가 직접 작성한 부고처럼 ‘당신에 대한 작별인사가 가장 가슴 아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