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사법부의 최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 손광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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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이 윤석열 검찰총장 지시로 주요 사건 재판을 맡은 판사들의 정치 성향과 개인정보를 수집해 관련부서에 배포하고 활용했다고 한다. 검찰이 작성한 문건의 내용과 의도, 활용 방식 등을 두고 검찰과 법무부, 그리고 사찰 대상이 된 법관들 반응이 상이하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이를 불법 사찰로 규정하고 검찰총장의 직무배제를 명령하는 주요 혐의로 제시한 반면 검찰과 법관들의 반응은 달랐다. 검찰은 이 문건 작성은 검찰의 통상적인 업무에 속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고, 지난해 12월에 개최된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들은 해당 재판이 서울행정법원에 계류되어 있으므로 의견을 낼 수 없고 또한 이에 대한 의결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신중한 자세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사찰을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검찰청에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담당 부장검사는 이 문건의 의도가 “누구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주요 사건 공판 검사들이 공소유지를 원활히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며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총장님의 징계사유가 되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나간 사실이지만 법무부의 검찰총장 직무배제처분은 서울행정법원이 검찰총장의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면서 무효화되었다. 대통령 재가까지 득한 징계처분이 행정법원 단독판사에 의해서 한순간에 원점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하나는 법관 사찰에 대한 검찰의 전반적인 인식이고—크게 보아 법관도 마찬가지—또 하나는 삼권분립의 문제다. 행정부에 대한 사법부 견제가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사법 권력과 검찰 권력을 하루빨리 주권자에게 돌려주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난다.” (사진=대검찰청 유튜브)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에 올린 위의 부장검사 말은 검찰이 신임검사 때 선서한 것처럼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라면 이해가 된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위해를 가하는 범법자에 대한 수사는 당연히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현대사를 통틀어 검찰의 거짓날조를 수없이 목격해왔다. 지금도 기소할 것과 기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공소유지를 위한 소위 그들의 통상적인 업무를 염려하는 것이다. 검찰이 막강한 정보력과 힘을 동원하여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국민은 돈 있는 사람이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변변한 변호사도 구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검찰이 법관 성향까지 분석하며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동안 기울어진 운동장 한편에 무방비로 두들겨 맞는 무고한 국민이 있다면 그것을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서울행정법원 판결에 따라 검찰총장이 업무에 복귀한 후에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법원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주권재민의 국가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단독판사 판결에 몸을 굽힌 것이다. 삼권분립의 확실한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몽테스키외가 말한 삼권분립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을 압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입헌군주제의 당시 체제에서 그는 군주의 행정 권력과 귀족의 입법 권력이 남용되어 인민의 자유와 권익을 침해할 것을 우려하였고 그 결과 인민에게 사법권을 할당하는 삼권분립을 주장하였다. 권력을 가진 인간은 그 한계가 드러날 때까지 권력을 남용하게 되어 있으며, 권력의 그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권분립의 취지는 견제를 통하여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는데 있으며 어느 한 권력이 다른 권력을 지배하는데 있지 않다.

우리 헌법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영국 명예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 로크나 동학혁명의 불꽃을 일으킨 수운 최제우 선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국가란 인민이 자연의 상태에서 지켜낼 수 없었던 천부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일정 수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한시적으로 그들에게 권한을 양도한 사회조직이다. 그러기에 존 로크는 국민이 선출하고 동의하지 않은 그 어떤 권력이나 법도 구속력이 없으며, 최고 권력은 국민이 부여한 것이므로 위탁된 취지와 반대로 권력이 국민을 억압할 경우 이를 제거할 권리를 국민이 갖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사법권은 국민이 동의하고 선출한 권력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법관과 검찰은 신성불가침의 권력이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국회의원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가 끝나면 심판을 받지만 그들은 심판받지도 않는다. 그들은 제도적 권력이다. 사법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그들은 퇴임 이후에도 변호사로 부와 권력을 유지한다. 민의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지배한다. 그 누구도 재판부의 판결에 토를 달면 그는 법치주의를 무너트리는 자요, 민주주의의 훼방꾼이 된다.

법관은 신이 아니며 법관 개인의 판단이 옳다고 할 어떤 근거도 없다. 판례가 쌓여가면서 법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을 때 그들의 판결은 사회를 전진시키지도 감동을 자아내지도 못한다. 법관은 (비록 전문분야에 일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한정된 자료와 개인적인 성향에 좌우되는 인간일 뿐이며 그의 판단이 국민 다수 판단보다 더 선하고 정당하다고 장담할 어떤 근거도 없다. 법관은 그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민중 다수와 유리되고 생리적으로 가진 자와 가깝다. 우리나라처럼 실무경력 없이 시험성적만으로 일찌감치 판사가 된 그들이 제한 없는 사법 권력을 갖게 된다면 주인인 국민을 얕보게 되고 종래는 법 만능주의 사회가 되어 소수의 강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과두정으로 국가는 전락하고 만다.

우리나라 법관과 검찰의 임용제도는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과 일반문관시험, 미군정기 조선변호사시험, 정부수립 이후 사법고시와 같이 기본적으로 시험을 거쳐 인원을 선발하고 관리한다. 이는 미국이나 영국, 호주 등의 여러 나라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일일이 예로 들 순 없지만 미국 대부분의 주는 10년 이상의 법조경력(대부분 변호사)을 지닌 자를 주지사가 제한된 기간 동안 임명하고 임기가 끝나면 주민 선거를 거쳐 법관과 검사장으로 재임된다. 연방법원 역시 10년 이상의 법조경력을 지닌 자 중에서 덕망을 갖춘 인물을 상원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민의를 거스르는 판사와 검사에 대해서는 주민이 선거로 심판하며 주민소환제를 통해 언제든지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법정에서 판결 또한 법관 개인 성향에 따라 선고될 가능성이 적다. 법정에서 피고인은 ‘배심원제’를 선택할 권리를 지니며 재판부는 특별한 이유 없이 배심원의 결정을 제척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국민이 법의 최종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랜 전통을 거쳐 민주주의를 안착한 영국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에 행정법원 단독판사가 대통령의 재가를 득한 징계처분에 반하는 판결을 내렸다면 그 판결은 진한 감동과 함께 삼권분립의 빛나는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국민 다수 뜻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합리적으로 내린 결정이—비록 절차상 다소 미흡함이 있었다고 하나—판사 한 명의 판결에 의해 정지되었다. 권위주의가 청산되고 민주 정부가 정착하는 과도기적 시대의 부작용이다. 민주화에 걸맞지 않은 낡은 제도는 버려야 한다.

자국민을 이용하여 독립투사를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던 일제 식민지 제도를 개혁하라고 엄동설한에도 촛불을 들었으며 국회 과반 의석까지 확보해 주었건만 선거 때가 되자 여당은 슬그머니 사면카드를 흔들면서 잡아놓은 고기라며 저편을 기웃거린다. 공명정대해야 할 재판을 부패한 정치와 뒷거래한 사법농단 판사 66명 그 누구도 죄에 합당한 처벌은 받은 적 없다. 국회는 4년 넘도록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탄핵 발의의 운을 띄웠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헌법재판소가 이를 받아들일지 두고 볼 일이다. 민주정부의 대통령을 고졸이라고 조롱하던 검찰, 자발적인 개혁을 통해 민주 검찰로 거듭나기를 바라던 대통령에게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던 검찰, 그들 앞에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대통령을 역사의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기에 깨어있는 시민들은 오늘도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여당에게, 착하고 과묵한 대통령에게 미운 지지를 보내야만 한다.

사법 권력과 검찰 권력을 하루빨리 주권자에게 돌려주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난다. 데모할 때도 성조기가 나부끼는 이 나라에서 사법제도만큼은 모르쇠로 일관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법제도만큼은 미국을 따라 했으면 한다. 첫째, 법관과 검찰은 장기간의 변호사 경력을 지닌 인물 중에서 임명 또는 선출하여야 한다. 둘째, 법관과 검찰을 대상으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여야 한다. 셋째, 배심원제를 의무화하여 법관의 편향된 판결을 막아야 한다. 넷째, 퇴임 이후 변호사로 전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야 한다. 이 네 가지 사항이 정비되어야 법관과 검찰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임기 중에 책임을 다할 것이며 덤으로 사회봉사에 눈을 돌리는 변호사까지 얻게 될 것이다. 보아하니 어렵게 출범한 고위공직자수사처도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 않다. 공수처 설치보다 중요한 것은 법관과 검찰의 자체 시스템을 손보는 일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면 정부와 국회는 지금 이 일에 매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