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

세월호 유류품, 유품 전수기록조사 참여기

13:57

4일 오후 9시, 차분한 분위기의 안산분향소에 도착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팽목으로 버스가 떠나려면 한 시간이 남았다. 일행들과 주차장을 서성이는 동안 연락이 된 일정 담당자는 날씨가 추우니 유가족 대기실에 와서 몸을 녹이라 했다. 분향소 주위에 놓인 컨테이너의 찬 문고리를 돌리자 따뜻한 세상이 나왔다. 소파에 삼삼오오 앉자 닭강정과 막걸리 두 병이 건네져 왔고, 그러다 보니 금세 한 시간이 흘렀다.

오후 10시, 유가족이 탄 버스 한 대와 자원봉사자, 사진가들이 탄 버스 한 대가 안산을 떠났다. 416 기억저장소의 담당자들이 버스에서 간단히 일정에 대한 공지를 전했다. “아마 세 시쯤 도착할 것 같은데요. 여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여덟 시부터 기록 작업을 하겠습니다. 버스 돌아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오후 네다섯 시까지는 정리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다섯 시간가량을 달려 팽목항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개의 컨테이너에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잠이 쏟아져 아침부터 펼쳐질 고된 풍경에 대해 고민할 틈도 없었다.

다음날 오전 6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아침을 먹었다. ‘찬민 아빠’가 사람들이 온다고 오래 준비한 떡국이라고 했다. 조금 따뜻해진 몸으로 오전 7시 30분, 진도군청으로 출발했다. 유의사항에 대한 고민을 서로 나눈 뒤 바로 장비들을 꺼내 촬영 준비를 하자 자원봉사를 오신 한 분이 다가와 섰다. 박스를 들어 옮기고, 물품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비닐에 담고 꺼내고 옷걸이에 걸어주는 작업까지 옆에서 도와주셔서 촬영이 수월했다.

▲ 자원봉사자와 사진기록자가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 자원봉사자와 사진기록자가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 끊은 담배가 간절해질 만큼 기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촬영은 쉽지 않았다.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유가족들의 간절한 시선이 내 손끝에 내리 꽂혔다. 결국 답답해져 흡연도 하지 않을 거면서 동료를 따라나서 겨울바람을 마셨다. 상황이 괜찮으면 취재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온 진도지만 아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나마, 가슴이 답답한 이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자기 아이 물건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봐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많이 속상해하세요.” 옆에서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뱉던 동료가 눈이 그렁그렁해져 덧붙였다. “그 나이에는 부모님에게 자기 물건들 감추려고 하잖아요. 당연해요.”

색색의 속옷부터 교복, 필통, 색소폰, 과자, 모자. 한 짝씩만 남겨진 운동화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 남아 있었다. 빛바랜, 녹슨, 악취가 남은 ‘너무 흔한’ 물건들에 <빈 방>을 처음 촬영할 때 느꼈던 생경한 기분을 다시 느꼈다. <빈 방>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주인 잃은 방을 사진가들이 촬영해 사진으로 남기는 프로젝트다.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이 희생자의 대다수인 만큼,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그 아이가 이제 돌아오지 않는 방을 함께 돌아보는 일은 상상보다 더 괴로운 일이지만 또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직접 유품을 보니 이것이 현실이고 ‘진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실감이 났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한 대학생이 밝혔던 이 소감이 적확하다.

녹이 슬어 공구로 잘라내고 뜯어내야 하는 캐리어 가방들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유가족들은 바삐 움직였다. 어느 가방에서 빛바랜 과자가 잔뜩 나오자 눈을 떼질 못했다. 정리정돈이 잘 된 한 가방에서 한약과 자잘한 세면용품들이 나오자 “꼼꼼하게 다 챙겨갔네, 약까지…” 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내 아이의 것인지’ 옷 치수를 확인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유가족들이 서로에게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어떤 가방을 확인해보라며 조언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허리가 아프다 목이 아프다 힘이 든다 솟구치던 말들은 자연히 삼켜졌다.

▲ 세월호 수색과정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기록참가자와 유가족이 보고 있다
▲ 세월호 수색과정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기록참가자와 유가족이 보고 있다

허리를 펴고 꺾인 목을 두드리며 숨을 돌리는 동안 옆에서 한 사진가가 뉴스 인터뷰를 했다. “아직까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밝혀질 때까지는 뭔가 좀 같이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에요.”

2014년에 일어난 일이 두 해가 지나도록 아무 해결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모두 새삼 ‘새삼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벌써 2년이 가까워져 오는데, 정부가 해야 할 모든 일은 유가족과 시민이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가량까지 이어진 기록작업이 모두 끝난 뒤, 고 임찬빈 군의 어머니가 참여 유가족을 대표해 소회를 밝혔다.

“전에 꿈을 한번 꿨는데 아이들끼리 식탁에서 놀고 있었고… 그때 저희 아들이 이러더라고요. 애들이 내 청바지를 하나씩 가져갔는데 안 준다고. 아들이 아끼는 청바지 세 개를 모두 챙겨갔는데 빈 가방만 나왔어요. 나중에 점퍼 하나만 나와서, 추후에 유품이 더 건져지면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이게 나와도 걱정 안 나와도 걱정. 걱정이 돼요. 오늘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서운한 감도 있지만, 또 나와도 서운했을 것 같고, 힘들었을 것 같고, 그런 상황입니다. 지금 나라에서 해결 못 해준 이런 일들, 기가 막힌 일들, 우리가 하고 있고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뭉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규명 될 거라고 믿어요.”

그로부터 다시 다섯 시간을 달려와 서울이다. 일상을 잇고 있으니 유가족들의 의문대로 왜 이런 중대한 일을 ‘내가’ 해야 했던 건가, 주인을 찾지 못한 유품들은 왜 컨테이너에 구겨져 방치돼 보관되어야 했을까, 여러 고민이 든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아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는 유가족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던 카메라를 든 나는,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렇게 조금의 죄책감을 던다.

2016년 1월 5일, 2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20여 명의 사진가가 2014년 세월호 수색과정에서 발견된 천여 개의 유류품, 유품을 사진으로 정밀 기록하고 정리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약 1년 9개월 만이다. (기사제휴=참세상/정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