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눈사람-예수-호모 사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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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창작괴비평사,1979)는 정호승의 첫 시집이다. 제목만 보면 시인이 기획한 정동이 ‘슬픔→기쁨’의 결실을 향해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시집을 다 읽어도 기쁨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두 번째 시집『서울의 예수』(민음사,1982)에서도 달라진 게 없어서 해설을 맡았던 평론가는 “그의 시들에서 민중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경우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라고 썼다. 첫 시집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을「맹인 부부 가수」의 전문을 보자.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이 시에는 향후 열네 권의 시집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될 시인이 지속하게 될 몇몇 시적 특징이 있다. 먼저 꼽을 것은 안정된 율격이다. 시인은 첫 시집을 낸 이후, 우리 시의 전통적 율격을 계승한 전형적 서정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이 시에서는 7ㆍ5조가 기본형이다. 해체와 실험 공세가 드세던 80대에도 정형율격에 바탕한 시인의 시풍은 끄떡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계급의 가장 하층인 기층민(=Lumpen Proletariat)의 등장이다. 이 시집에는 행상(「슬픔이 기쁨에게」), 맹인(「맹인 부부 가수」ㆍ「촛불을 들고 거울 밖으로」), 혼혈아(「혼혈아에게」), 넝마주이(「가두 낭송을 위한 시 4」), 창녀(「가두 낭송을 위한 시5」ㆍ「옥중서신 4」ㆍ「매춘」), 거지(「무악재」), 지게꾼(「소문」), 매혈꾼(「밤기차를 탄다」), 구두닦이(「구두 닦는 소년」), 피난민(「벼꽃」ㆍ「바다와 피난민」), 죄수(「어느날 밤 언덕이」), 꼽추(「꼽추」), 문둥이(「감자」), 등짐장수(「장터」), 머슴(「지게」) 등이 수시로 나온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세계관과 창작관이 다른데, 나열된 소재 가운데 몇몇은 역사보다는 운명에 가깝고, 구성보다는 재현이 더 용이하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이다.

「맹인 부부 가수」는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을 드러낸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이 시에 나오는 기다림과 용서라는 주제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적이다. 시인의 시가 휴머니즘적 이상에 고착되어 구체적 현실의 탐색이나 형성에 무력하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주제이기도 했던 기다림과 용서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기다림은 현실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저항 속에서 생겨나는 적극적인 의식이며, 용서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능력이 배양되어야 한다. (시에서는 문법 파괴조차도 흠이 되지 않는다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라는 윗 구절과 맞추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가 되어야 맞다).

이 시집에는「맹인 부부 가수」를 포함하여 ‘눈사람’이 나오는 시가 여덟 편이나 되고, 아예 제목이「눈사람」인 시도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관점으로 보면 저 눈사람은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으로서의 주권이 모두 박탈된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그런데 “눈사람으로 그가 곧 돌아온다고 한다.”(「소문」)라는 놀라운 구절을 보면, 정호승의 눈사람은 호모 사케르이면서 예수를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맹인 부부 가수는 시종일관 “눈사람을 기다리”다가, 시의 마지막에서 “눈사람이 되었다.” 이로써 시집의 제목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