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100호-서평] 집단기억과 개별성의 고통 사이 /서영인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16:12

[편집자 주=이 글은 계간 <삶이 보이는 창> 100호(2014.9.24)에 실린 글입니다. 뉴스민은 <삶이 보이는 창>과 컨텐츠 제휴를 맺고,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집단기억과 개별성의 고통 사이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서영인 문학평론가.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이 있다.

1
2012년 대선 직후, 시내의 극장은 <레미제라블>에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대선 패배의 스산한 연말 거리에는 실패한 혁명의 영상과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합창이 흘러 넘쳤다. 대선이 끝나자 뒤늦게 몰려든 관객을 두고 ‘힐링무비’라는 해석도 등장했다. 기병대의 행진을 둘러싸고 울려 퍼졌던 혁명가와, 바리케이드 뒤편의 다른 세상은 현실의 공간에서 불가능했던 욕망의 대리충족이었을까. 과연 혁명을 위한 열정은 순수했고 실패했을지라도 그들의 희생은 숭고했다. 그러나 실패한 혁명에 덧붙인 숭고의 아우라는 때로 망각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학정과 독재에 반대한 민중의 노랫소리를 아름다운 패배의 기억으로 내장해 두고 새해의 일상으로 복귀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향한 정치적 열망은 못내 아쉽지만 간직하기에는 부담스러웠으므로 이루지 못한 꿈으로 적절히 갈무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리케이드의 봉기 이전, 가혹한 폭력정치에 시달린 민중들의 고통어린 삶과 처참한 가난의 장면들이다. 위안 받을 수 없는 고통을 기억함으로써만 혁명이 그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으며, 그랬을 때 혁명은 가혹한 현실을 덮는 위안효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

문화예술의 의미와 효과는 언제나 그 작품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읽히는 지점에서의 대중의 욕망과 기억에 연쇄된다.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서만이 아니고 뮤지컬 형식의 장중한 영상으로서만도 아닌 방식으로, 2012년 한국의 정치현실과 집단감성의 맥락 속에서 그 효과를 발휘했다. 한 시대에 환기되는 역사적 기억이란, 서사의 형식이란 언제나 역사에 덧붙여지는 현재의 해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발생한 것이든 혁명의 노랫소리에는 언제나 광주의 그림자가 있다. 최근 한국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광주의 기억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새삼스레 왜 30년 후의 시점에서 광주냐는 질문은 곧 우리의 현재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도 이러한 질문은 당연히 제기된다.

2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용산의 솟구치는 화염을 보며 광주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작가가 덧붙인 광주의 정의(定義)는 곧 지금 여기에서 작가가 광주를 써야 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독자가 오늘 광주를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쪽)

2009년 1월에, 그리고 2014년 4월에 광주를 다시 읽어야 한다면, 고립되고 짓밟힌 모든 것들을 광주의 기억으로부터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30년이 훨씬 지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폭력과 고립과 훼손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리고 분노가 새로이 광주를 불러와 다시 쓰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80년 5월 그날 사라진 영혼에 대한 간절한 안타까움으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던 어린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힘없는 생명들의 고통에 주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보다는 거기에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고통의 깊이로 지금 우리의 삶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은 그날 도청에 남았던 한 소년과,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후 이야기들을 단속적으로 섞어 짜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친구를 찾아 도청에 온 중학생 소년 동호가, 그때 도청에서 시체들을 정리했던 여고생 은숙이, 미싱사 선주가, 대학생 진수가, 그리고 아들을 잃은 동호의 어머니가, 그리고 소설을 기록하는 작가가 분절된 장의 주인공이 되면서 소설의 각 장은 독립된다. 광주의 이야기는 이들 각각을 주인공으로 하여 다시 시작한다. 그리하여 소설 『소년이 온다』는 각 개인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결말을 향해 진행되기보다는 반복되면서 병치된다. 『소년이 온다』가 재구성한 광주 이야기는 개별적 고통이 그려내는 단독성의 역사들이기도 하다. 유일한 고통들이 광주라는 집단의 기억을 개별화시키면서 대체 불가능한 죽음의 비극성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별적 고통들의 완강한 단독성이 ‘5월 광주’에 투사된 집단기억들과 쉽게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5월 광주’를 읽는 독자가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징성과 집단기억이 없었더라면 이 개별적 고통의 서사들이 어떤 공공성을 확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를테면 ‘5월 광주’의 기억을 두고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은 생생한 느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114쪽)을 말했을 때, 거기에는 집단 학살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 양심들의 숭고함이 있다. 그러나 또한 그 숭고함 이후의 고통들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어떤 식으로도 위로 받거나 공유될 수 없는 완강한 개별성을 주장하고 있다. ‘숭고한 심장의 맥박’과 ‘공유될 수 없는 고통’은 서로를 밀어내지만 또한 다른 한쪽이 없다면 나머지 한쪽이 존재할 근거를 잃게 되므로 서로가 필요불가결한 모순이 된다.

이 불안한 결합을 읽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공유될 수 없는 고통에 얹는 방식. 공유될 수 없는 고통을 앓고 있는 광주의 경험자들은 그 고통의 지극함에 숭고한 심장을 얻어 순교자적 존재가 된다. 그 고통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회복될 수 없으면 없을수록 이들의 숭고는 더욱 높고 아름다운 것이 될 터이다. ‘공유될 수 없는 고통’을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숭고한 심장의 맥박’의 정체를 끝까지 묻는 방식도 있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 숭고한 심장의 맥박으로부터 왔다면, 아직 그 맥박은 숭고로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통의 정체를 묻고 또 물으면서 인간적 모멸과 용서될 수 없는 죄책감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를,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집단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 일. 아마도 그것이 이 극단적으로 결벽(潔癖)한 서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될 것이다.

3
생각건대 『소년이 온다』는 이 두 가지 방식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살아남아 출판사 직원이 된 은숙이, 살아남아 시민단체의 전임자가 된 선주가 개별적 삶의 지독한 고독과 고통을 견디고 있을 때 이들은 집단 학살의 증언자로서, 고립과 폐쇄의 삶을 견디는 순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어린 동호의 죽음을 떠올릴 때, 검열과 강압을 견디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기억들로 겨우 일어설 때, 그들은 일반화될 수 없는 숭고의 수사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각 장은 구분되어 있고 그 장의 주인공들은 각자 존재하지만, 그들의 삶은 대체될 수 없는 고독과 고통으로 완강하지만, 그들의 삶에 출몰하는 동호의 넋으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개별적이지 않다. 이 완강한 개별성들과 희미하게 이어진 고통의 연대와 이입이 광주 이야기를 훨씬 까다로운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손쉽게 승화되지 않는 개별적 고통들을, 광주 이야기의 까다로움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집단기억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을까. 이를테면 광주와 다를 것 없는 야만적 시간들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지만, 그래서 ‘뜨거운 심장의 기억’으로 이 무력한 야만의 시간을 견디고 싶겠지만, 그 기억으로 통합되지 않는 고통의 생생함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 또는 그 고통의 완강함 앞에서 더 막막해질 시간들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공공성의 기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추적하는 끈기. 바로 그 힘들이 우리 시대의 모든 짓밟히고 고립된 것들로부터 광주를 다시 읽는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로부터 현실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다시 광주를 읽을 수 있을 때, 새로운 광주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집단기억과 개별성의 고통 사이에서 그 불안한 출발을 알리고 있다. 망각할 수 없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최소한의 현재성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고립된 결벽으로 완강하다는 점에서 아직 현재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