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4) 멈추지 않는 비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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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김수영은 지금껏 살핀 네 작품 외에도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이」, 「웃음」, 「토끼」, 「아버지의 사진」, 「아침의 유혹」을 남겼다.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 의하면 「거리」라는 시도 이즈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원문은 없고, 김수영이 기억나는 부분만 기록해 놨다. 「거리」에 대해서 김수영은 “리얼리스틱한 우수한 작품”이라 자평하면서 “나의 유일한 연애시이며 나의 마지막 낭만시이며 동시에 나의 실질적인 처녀작이다”고 고백했다. 이 작품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입증하려는 듯이 김수영은 제법 상세하게 「거리」가 창작된 계기와 거기에 딸린 에피소드를 남겨놓았다.

「이」에서 김수영은 “이”라는 기생충을 통해 전통 사회와 근대 사이에 낀 자신의 자아를 드러낸다. 자신은 “한번도 이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규정하지만,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고 말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이”가 “어제의 물처럼/ 걸어나온다”면서 “이”가 상징하는 과거의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음을 고백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과거에 대한 이 예민한 자의식은 역으로 해방 이후 벌어진 혼란스런 상황과 드라마틱한 변화가 더 강제했을 수도 있다. 새로운 현실 앞에서 혼란스러운 자아는 곧잘 지나온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웃음」에서는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라고 말한다. 현실과 무관한 “웃음”은 단순한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말은, 도대체 웃음 같은 것은 선물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반어인 동시에 자기풍자이기도 하다. 웃음은 자기원인이 아니라 외부의 작용에 의한 긍정적인 감정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런 인식은 마지막 연에서 끝내 “나는 내 가슴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고 말하게 한다. 물론 여기서 “종지부”는 이쪽 시간과 저쪽 시간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다잡으려는 의지이지 실질적인 선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토끼」에서는 이런 구절도 보인다. “몽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것일까”. “또 하나의 것”은 아직 자신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진술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것”에 대한 태도가 단지 제스처가 아닌 것은 “또 하나의 것”을 “별과” 함께 보겠다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언제나 김수영의 모험과 도약은 내적인 싸움을 동반했는데, 여기에서도 그것은 뭉클하게 도드라진다. 물론 시에 암시적으로 드러난 표현을 가지고 섣불리 그것이 무엇인지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시를 읽을 때도 속된 호기심은 멈추지 않는데, “별”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것은 일종의 ‘이념’은 아닐까? 당연히 여기서 ‘이념’은 형해화된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이념은, 칸트적 의미에서 “참된 문제들을 구성하거나 정당한 근거를 지닌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리고 “칸트가 종종 언급하는 바에 따르면, 이념들은 ‘해답 없는 문제들’이다. 이는 이념들이 필연적으로 어떤 거짓 문제들이고, 따라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그것은 참된 문제들이야말로 이념들이고, 이런 이념들 ‘자체’는 해결된다고 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370~371)

다시 말하면, 이념은 세상을 인식하는 틀(frame)이나 현실을 해석하는 번역기가 아니라 김수영이 「공자의 생활난」에서 말한 ‘바로 보기’의 계속적 이행에 다름 아니다. ‘바로 보기’는 사건과 대상을 틀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와 운동까지 포괄적으로 보는 행위이며 ‘바로 보기’ 자체가 운동이다. 현재 김수영은 “바로 보마”라고 선언한 후, “바로 보마”의 실천적 층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이다. 어쩌면 ‘바로 보기’를 몸으로 득하는 순간이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것”이고 “별”은 아닐까? “곡선 같은 것”은 그 순간이 명징한 무엇이 아니라는 뜻도 되지만, 우리가 목적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은유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김수영의 시 전체는 바로 이 ‘이념’에 대한 그치지 않는 고투일 것이다. ‘바로 보기’의 계속적 이행, 그리고 운동 그 자체로서의 ‘바로 보기’가 아니면 김수영의 시적 공생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이 “육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것”이 명징하지 않은 “곡선 같은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에게 “비참”을 가지게 한다. 「아버지의 사진」에서 그는 “육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것”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짐을 자청하고 나서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는 역사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게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푸른 눈은 아니오

-「아버지의 사진」 부분

김수영이 느낀 “비참”은 아버지에게서 자신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이 남긴 “비참”이다. 일종의 픽션이지만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이 재구성해 놓은,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온 김수영이 고모 집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잠시 서울에 들렀던 어머니를 따라 만주로 가는 장면은, 청년 김수영을 이해하기 위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김수영이 어머니를 따라 북행열차를 탄 것은 그해(1944년-인용자) 겨울 밤 9시, 압록강 철교를 건넌 것은 다음날 새벽 5, 6시경이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광대무변한 들녘의 눈앞에 다가왔다. 우리나라와도 다르고 일본과도 다른 그 풍경을 접하면서, 김수영의 마음속에는 단순한 절망이라 하기 어렵고, 불안 초고 기대라고 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저것은 무엇이냐, 저 광대무변한 것은 무엇이냐, 저것이 나냐, 세계냐, 신이냐, 김수영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열차는 힘찬 기적을 울리면서 달렸다. 파도와 같은 감정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듯싶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전에는 그다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조선 강점과 지배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강점’과 ‘지배’를 차창의 풍경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만주 벌판을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는 조선이 망했다는 것, 그의 집안이 망했다는 것, 그리고 징집을 피해 자신이 동경을 탈출했으며, 현재는 만주로 가고 있으며, 그의 집안도 만주로 가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야욕 때문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되씹게 되었다.(68-69)

이러한 경험들이 어떻게 “비참”이라는 수동적 정서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다고 말할 때, 그 “비참”은 김수영 자신의 경험과 아버지의 경험이 공통적으로 만들어낸 정서인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강조-인용자), 즉 이 ‘~하지 않아도’에는 아버지와 공유하고 있는 경험 혹은 정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김수영은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신의 “비참”을 통해 “아버지”가 겪었을 “비참”도 그는 알고 있지만 “조바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어제오늘만의 이치가 아니다.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될 뿐이다. 심지어 “나의 무리無理하는 생”은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게 만든다. 이 말은 아버지 시간과 나의 시간은 깊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내가 무리하면 아버지의 시간도 무리가 된다는, 과거 역사는 현재의 삶이 결정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번뜩이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바심”을 통한 “무리”는 “아버지”의 삶도 결국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으로 다시 굴러떨어지게 할 수 있다. “편력의 역사”, 다시 말하면 이념은 존재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역사를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김수영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다음에 말줄임표(……)를 쓴 것은 그도 아직 그 이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또 하나의 것”은 아직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김수영이 말하는 “비참”은 자신이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에 기인하며, 아마도 부친의 죽음(「아버지의 사진」은 1949년 작인데, 1949년은 그의 부친이 숨진 그 해이다.)을 생각하며 아버지가 산 비참한 시간을 자신이 이어받고 있다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사진”이, 즉 아버지란 존재가 이제 “또 하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이제 “비참”은 자신의 몫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분명 그는 집안의 맏이로서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김수영은 그것을 역사의 무게에 포개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그 성과와는 상관없이,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김수영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느낀 비참은 강력한 현실이 되어 밀어닥쳤다. 어쩌면 그가 느낀 비참은 그가 살았던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의 기저에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