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가짜뉴스를 대하는 세 가지 원칙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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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기술은 이제 문자와 사진 정도가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동영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딥페이크(deep fake)’다. 이는 인공지능, 딥러닝, 페이스 매핑 기술을 이용해 특정인의 얼굴, 표정,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 영상을 뜻한다. 2018년에는 “트럼프는 완벽한 멍청이”라고 말하는 오바마의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딥페이크의 위험을 경고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영상이지만, 알고 봐도 가짜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딥페이크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대한민국은 가짜뉴스(fake news)가 넘쳐나고 있다. 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인지자원이 낭비되었고, 지금도 낭비되고 있다. 게다가 가짜뉴스 자체가 큰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발생시킨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북한 특수군이 내려왔다’, ‘세월호 유가족‧피해자만 과도한 보상을 받는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가짜뉴스는 그 정의부터 해결책까지, 온통 ‘지뢰밭’이다. 가짜뉴스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학계와 업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먼저, 언론사 아닌 주체가 생산한 뉴스가 가짜뉴스라는 주장이 있다. 그게 아니라 거짓정보, 루머, 오보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오보 같은 실수가 아니라 명백한 의도가 들어간 허위정보만을 가짜뉴스라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가짜뉴스라는 용어 자체가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페이크뉴스”라고 부르든가 아니면 “허위조작정보”라는 말을 쓰자는 제안도 나왔다.

이렇게 ‘가짜뉴스’의 정의 자체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워낙 사회적 악영향이 크다보니 당장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가장 쉽게 튀어나오는 건 ‘규제 강화’다. 하지만 규제를 하려고 해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뭘 기준으로 규제할 것인가?

가짜뉴스를 전부 규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또한 규제 범위는 가급적 좁히는 게 좋다. 가짜뉴스가 이른바 ‘공공선’을 가장 해치는 경우는 언제일까. 그것이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선동/혐오발언으로 기능할 때다. 이런 큰 방향을 전제한 뒤, 가짜뉴스 대응 원칙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국가의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개입은 최대한 회피되어야 한다.

둘째, 공인 및 권력기관을 향한 가짜뉴스의 규제는 헐거워야 한다. 셋째, 비공인, 특히 사회약자와 소수자에게 피해를 주는 가짜뉴스는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

가짜뉴스에 대한 국가의 직접개입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역사를 돌아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장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하는 행동들만 봐도 그 폐해가 드러난다. 가짜뉴스를 빌미로 불편한 언론과 항의하는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부와 권력자들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가짜뉴스의 폐해가 아무리 크다 해도, 국가의 무차별적 개입과 규제보다는 덜 해롭다. 이는 첫 번째로 중요한 원칙이어야 한다.

또한 공인과 권력기관(권력자)을 향한 가짜뉴스는 특별한 예외를 제하고는 처벌되어선 안 된다. 이런 종류의 가짜뉴스를 처벌하기 시작하면 기본적 권리인 언론의 자유가 심대하게 침해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공인’은 관료, 국회의원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단언컨대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유명인일 뿐이다.) 공인은 현격한 권한과 큰 책임을 지고 있기에 비판을 피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사람들 즉, 공적 직위에 있는 사람이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공적 활동과 관계있는 한 그야말로 ‘최대한도’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 물론 부정확하거나 날조된 정보로 공인과 권력자를 비방하는 시민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민들은 어디까지나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동료시민에 의해 반박되어야 한다.

가장 결정적인 원칙은 세 번째다. 세 번째 원칙을 논의하기 전에 가짜뉴스가 규제되어야 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그것이 진실이 아니어서? 사람들의 인식에 혼란을 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만약 가짜뉴스가 규제되어야 한다면, 그 궁극적 이유는 거짓정보가 만들어낸 평판과 비판 등이 무고한 인간에게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무고한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강자와 권력자를 향한 가짜뉴스와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가짜뉴스는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 기계적 균등 또는 기계적 공정성은 큰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내면서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 문제 자체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보호를 받아야 하며, 가짜뉴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약자‧소수자는 강자‧권력자와 달리 스스로를 보호할 사회적 자원이 매우 적기에 쉽게 피해자가 되고 그 고통 역시 크고 오래 지속되기 쉽다.

가짜뉴스 문제의 핵심에 미디어 리터러시가 있으며 따라서 시민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화해 해결하자는 주장은 원론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공허하다. 미디어 리터러시란 쉽게 말해 매체에 대한 문해력, 이해력, 또는 활용능력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특히 촛불집회 같은 국면에서 활약한 ‘표현대중(정보의 능동적 소비자이자 유통자인 시민들)의 미디어 리터러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에서는 미디어를 무턱대고 믿어버리거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게 문제라기보다, 가뜩이나 낮았던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대다수 미디어가 철저히 부패했다고 판단하기에 최소한 게이트 키핑조차 없는 루머의 진정성을 믿는 역설적 상황, 그것이 오히려 현실에 더 부합하는 설명이 아닐까? 혹자는 ’좋은 뉴스‘가 가짜뉴스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고 말하지만, 미디어 환경의 급변으로 생존이 위태로운 와중에 기존 매체와 기자들의 공적 의무감이 얼마나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다.

미디어 이론, 정보 이론적 접근도 도움이 되긴 하지만 결국 핵심은 가짜뉴스로 인해 사회적 차별이 실제로 발생하는가 여부다. 요컨대 가짜뉴스 문제는 ‘미디어’ 의제보다는 ‘차별’ 의제로 접근해야 한다. 가짜뉴스로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이들에 대한 제도적 보호조치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논의는 좀 더 이 부분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