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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이 넘지 못하는 문턱이 있다. 장애인 거주시설.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제한되어 왔던 이곳에 관심이 뜨겁다. 어떤 정치인은 “지역사회 복지서비스 강화 이전에 강요로 시행되는 탈시설 정책은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했다. 옳다. 하지만 누구도 장애인을 황무지로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탈시설’ 요구에는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요구가 포함된다. 그 준비를 해야 해야 할 의무가 정치인에게 있지만, 지금껏 정치는 그 의무를 외면했다. 정치가 사라진 비문명의 황무지에서,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는 한쪽에 헌법이라는 무거운 책무를, 한쪽에는 죄책감을 짊어져야 했다.

① ‘기환이 엄마’ 앞에 놓인 선택지
② 발달장애 아들과 황무지를 개척한 33년
③ 벼랑 끝 발달장애인 부모
④ 경북에서 장애인 자립하기
⑤ 장애인 시설 원장이 말하는 탈시설
⑥ 희망원에서 나온 금순 씨에게 자립이란
⑦ 장애인도 함께 사는 사회, 얼마나 준비됐나

4월 저녁, 경북 영덕군 외딴곳에 있는 차승현(55) 씨의 집은 계절을 따르지 못한 한기가 감돈다. 너른 집, 2층에는 어린이가 뛰어놀 수 있는 옥상마당이 있지만, 지금 이 집을 쓰는 사람은 승현 씨뿐이다. 방이 휑한 탓에 벽에 걸린 수영대회 상장과 메달이 도드라진다. 책장에는 성경책과 마음을 치유하는 잠언집들이 꽂혀 있다. 거실 곳곳, 징두리벽을 따라 걸린 그림들이 약간의 훈기를 냈다.

화목한 가정, 안정적인 직장. 경남 창원에서 은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던 승현 씨의 평온한 삶은 둘째 아들을 낳은 뒤 깨졌다. 1993년에 낳은 아들 기환이가 다른 집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렸다. 두 살, 승현 씨 친구들이 아이를 데리고 놀러 왔을 때, 승현 씨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기환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침대 밑에 들어가거나 커튼 뒤에서 혼자서만 무언가에 집중했고, 친구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차승현 씨가 아들이 받은 상장을 보고 있다

그저 조금 느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승현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환이를 데리고 남편과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자폐(발달장애 유형 중 하나)라는 개념도 희미하던 시절. 기환이는 자폐아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폐 정도가 심하고 지적장애까지 있는 중복장애라는 걸 알았을 때, 승현 씨는 남편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쓰러져 우는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수가 없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던 시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환이 나이 3살, 그때부터 승현 씨는 외벌이와 남매를 기르는 일을 홀로 해내야 했다. 아들이 발달장애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승현 씨의 삶은 곧 아들을 돌보는 삶이었기 때문에, 거처도 아들의 ‘치료’에 맞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게 됐다. 다니던 은행에 사표를 냈고, 자폐를 고쳐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수교육이 특화된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 앞에 전세를 얻었다. 심리 치료를 맡겨 보고, 자폐가 있는 변호사의 강연도 찾아다녀 봤다.

시간이 흘러도 자폐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먼저 떠난 남편, 도통 신경 쓰지 못한 딸, 교통사고 피해로 받은 보험금에도 바닥이 보이는 통장. 기환이의 장래를 생각하니 승현 씨에게 돌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막다른 길에 몰린 승현 씨를 도와준 건 가족 외에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대명동으로 거처를 옮겨와 살림을 거들었고, 그 덕에 틈날 때마다 공황장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승현 씨는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면서 아들의 장애도 인정하게 됐다.

아들의 장애를 인정한 승현 씨는 다시 고향 경남으로 돌아가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냈다. 특수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4년, 스쿨버스 타는 걸 좋아하는 아들은 학교에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적응했다. 아들이 학교에 간 동안 공인중개사 자격을 따 틈틈이 일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일의 기쁨. 시간을 조정할 수도 있어서 승현 씨 처지에 제격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년이고 유급을 시키고 싶었지만, 아들 나이는 어느덧 스물다섯, 더 이상 같은 학교에 머물 수 없었다. ‘졸업’을 이해하지 못한 아들은 큰 버스만 보면 그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렇지만 이제 학교에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갈 곳도 없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지역사회 서비스는 별달리 도움받을 게 없었다.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아보려 했지만, 남자 활동지원사 자체가 드물고 중증인 아들을 감당하려는 활동지원사는 더더욱 없었다.

나이를 먹은 아들은 도전적 성향도 갖게 됐다. 몸짓도 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꼬집거나 주먹을 휘둘렀다. 훌쩍 커 버린 아들의 주먹에 맞은 승현 씨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파트 14층, 같이 뛰어내리면 고단한 삶도 끝날 거 같았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보이는 똑같은 일상이 승현 씨를 짓눌렀다.

아들 나이만큼의 삶을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해서만 살아왔지만, 더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승현 씨에게 사는 길이 있다면 단 한 가지로 생각됐다. 아들을 장애인 거주시설에 보내는 것.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생각을 하고선 승현 씨는 다시 먼 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영덕에 있는 한 시설이 그나마 사정이 나아 보였다.

***

▲차승현 씨는 홀로 20년 넘게 중복장애을 가진 아들을 돌보다 4년 전 영덕의 한 시설로 아들을 보냈다.

아들을 영덕의 한 시설에 보내고 4년. 남편도 없이 혼자서 짊어진 장애의 짐은 죽도록 힘들었지만, 아들의 빈 자리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상황이 선택을 강요했지만, 죄책감은 떠나지 않는다.

아들을 시설에 보낸 상황에서 승현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설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이었다. 아들이 들어간 시설에서는 장애인 학대·인권침해 사건이 종종 벌어졌다. 장애인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사건이 벌어지자, 승현 씨는 고발에도 나섰다.

시설에서 장애인 학대 사건이 3차례 연이어 발생하고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후, 영덕군은 시설 폐쇄 처분을 결정했다. 승현 씨는 폐쇄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시설이 아닌 다른 방식의 생활에 대해 행정, 정치가 그 어떤 것도 준비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설 폐쇄는 곧 이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나이를 더 먹었다. 약하고, 가난하다. 그래서 승현 씨는 시설 폐쇄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승현 씨는 시설 지도에 책임이 있는 영덕군에 분노를 느꼈다.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의 권리에 관심이 없다가, 문제가 생기고 여론이 집중되니 대안 마련도 없이 덜컥 폐쇄를 결정한 것으로 생각됐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평소에 시설 문제나 자립생활 기반 마련에 관심을 두고 준비했어야 했다.

만약, 지역에 발달장애인을 돌볼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그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들이 개방된 사회 속에서 자유롭게 유대감을 갖고 살길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시도와 좌절을 반복해도 승현 씨는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지면, 길에 가로등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버스 하나가 두 시간에 한 번씩 지나가는 이곳, 시설이 아닌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은 막막해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명절이면 기환이가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가요. 한번 집에만 오면 기환이는 (시설로) 가기 싫어해요. 차에 타서도 안 내리려 하고. 그러면 또 영덕 시내를 빙빙 돌고. 과자를 사줘도 과자도 싫대요. 결국은 (시설) 선생님들 4명이 와서 데려가요. 보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시설에 자식 보낸 부모 마음이 다 같을 겁니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