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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이 넘지 못하는 문턱이 있다. 장애인 거주시설.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제한되어 왔던 이곳에 관심이 뜨겁다. 어떤 정치인은 “지역사회 복지서비스 강화 이전에 강요로 시행되는 탈시설 정책은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했다. 옳다. 하지만 누구도 장애인을 황무지로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탈시설’ 요구에는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요구가 포함된다. 그 준비를 해야 할 의무가 정치인에게 있지만, 지금껏 정치는 그 의무를 외면했다. 정치가 사라진 비문명의 황무지에서,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는 한쪽에 헌법이라는 무거운 책무를, 한쪽에는 죄책감을 짊어져야 했다.

‘기환이 엄마’ 앞에 놓인 선택지
발달장애 아들과 황무지를 개척한 33년

발달장애인 아들의 평생을 책임진 홍기선(67) 씨는 황무지를 개척하듯 살았다. 장애인 거주시설에 보내지 않고 오롯이 책임진 33년. 교육시설이 없으면 관청에 찾아가 시위해 교육시설을 만들어 냈고, 학교에 장애인 교육 체계가 없으면 학교를 찾아가 그 또한 만들어 냈다.

집단 거주시설만큼은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은 기선 씨가 나이를 먹고 건강을 잃어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2021년 직장을 은퇴한 이후, 체력과 건강이 나빠지면서 기선 씨 한 가지 고민이 기선 씨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동영이는 어떻게 살아가지?”

***

딸 둘을 낳은 기선 씨는 더 출산할 생각이 없었다. 특별히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1990년, 산아 억제 정책을 유지하던 때라, 셋째부터는 의료보험 적용도 되지 않았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압박을 이길 수 없었다. 급기야 남편은 다른 데서 낳아 오면 키울 거냐고 물었다. 이혼 도장 찍고 그러라고 답은 했지만, 3대 종손 집안의 분위기까지 이겨낼 수는 없었다. 둘째 나이 여덟 살, 기선 씨 나이 서른넷,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으니 대접이 달라졌다. 출산 후 병원에 누웠는데, 소식 전한 지 30분이 되기 전에 시부모님이 병원을 찾았다. 얼마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도 손자를 본 시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아들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느린 아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두 살을 먹을 때쯤, 방구석에 혼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밥을 먹여 줘도 기선 씨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큰 병원으로 향했다. 특별한 진단이 나오지는 않았다. 불안 반 다행 반으로 지내다 다시 다른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대구대학교에 가서 교수와 상담을 받아보길 권했다. 대구대학교 교수를 찾아갔더니, 아들이 장애인이라고 설명했다.

“아들이 보통 사람처럼 살 수는 있습니까?”
“자폐입니다. 그렇게 못 삽니다”

집안 분위기는 뒤바뀌었다. 시어머니는 손자더러 ‘지 애비 등골 빼먹는다’고 걱정했다. 아들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다. 기선 씨는 아들만 데리고 집을 나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서울로, 충청도로 병원을 옮겨 다니기를 반복했다. 치료할 수 있는 곳이 나타나리라 생각했다. 기선 씨 나이 서른아홉. 기선 씨도 점점 극한 상황에 몰렸다. 스트레스로 병원에 실려 가기를 반복했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기선 씨는 종교에 의지하게 됐다.

서울에서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육원에서 지냈다. 비슷한 사정의 부모들과 지내던 그때를 지금껏 가장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고 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요육원 생활이 1년이 되어가자, 남편이 서울로 올라왔다. 더이상 홀아비처럼 살 수 없다고 했다.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 장애인 판정을 받자고 했다.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발달장애(자폐) 1급 진단을 받았다.

다시 칠곡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고, 살아보기로 했다. 철학관에서는 이름에 나무 목자가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아들 이름에 동녘 동(東)자를 써, 동영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홍기선 씨가 아들과 남편,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 있다.

장애 아동 교육 황무지 경북
없는 특수반 만들어가며 교육 매달려
학교 앞 가게 얻어···돌봄에 맞춘 일과
학교 내 불화 겪으며 도전적 성향 강화

아들 장애를 인정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기선 씨는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기선 씨도 학교 앞에 세를 얻어 공방을 열었다. 언제든 학교로 달려가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담임 교사가 전교조 조합원이라 그랬는지 동영이에게 정성을 쏟았다. 한시름 더나 했더니, 학년이 올라 담임이 부장 교사로 바뀌고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시작됐다.

교사가 신경을 덜 쓰면서, 아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됐다. 소리에 민감한 아들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친구들은 자꾸 풍선을 터트렸다. 그즈음 동영이는 꼬집는 방법을 배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학생과 기선 씨마저도 꼬집었다. 스스로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지만, 아들 몸집이 크면서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중학생이 됐을 때, 학교에는 특수반이 없었다. 기선 씨는 학교를 찾아가고, 교육청에 요구도 해서 특수반을 만들었다. 새롭게 특수반을 맡은 교사는 경험이 없었다. 훗날 알아보니 그 교사는 아들이 있는 교실 문을 잠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 동영이는 커튼을 다 치고 다니거나 꼬집는 행동을 더욱 자주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감당이 안 된다는 연락을 받고 데려가는 날이 반복됐다. 어느 날, 아들이 진정되지 않는다는 교사의 전화를 받고 차를 몰아 데려오던 기선 씨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이대로 죽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생은 질겼다. 그래서 더욱 까마득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도 없는 특수반을 만들어 갔고, 고등학교 졸업 후 특수학교 전공과에도 진학시켰다. 전공과에서는 나사 박는 작업을 배웠다. 동영이가 취직해서 직장에 다니는 꿈을 잠깐 꿨지만, 작업장에서도 아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작업장을 다니기에 아들은 워낙 중증이었다.

주변에 보낼 곳이라곤 장애인 거주시설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설만큼은 보낼 생각이 없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아들의 행동도 더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남편의 수익이 있어 기선 씨는 오로지 아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아들 갈 곳을 찾기 위해 경북도청을 찾아 하소연하고, 칠곡군청도 찾아 시위도 했다. 칠곡군과 이야기가 돼 중증장애인자립지원센터 설립 지원을 받았다. 센터는 낮 동안 장애인을 돌본 다음 오후에 귀가하는 주간보호센터로 운영됐다. 기선 씨는 센터에서 다른 발달장애인과 함께 아들까지 돌볼 수 있었다.

센터 활동, 장애인부모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장애인 부모들과 교류도 깊어졌다. 그들도 기선 씨와 사정이 비슷했다. 거주시설만큼은 선택하고 싶지 않은데, 부모가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다른 선택지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한 엄마는 아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텔레비전을 들어 엄마에게 던질 정도로, 도전적 성향이 점점 심해지는 아들의 행동에 엄마도 우울증이 걸렸다. 발달장애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 부모는 경제적으로도, 아이보다 작아진 몸으로도 아이를 돌보기 어렵게 된다. 그의 남편은 결국 시설 입소를 선택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엄마는 두 달 동안 눈물만 흘렸다.

기선 씨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에게 전념했던 일생의 시간이 훌쩍 갔고, 기선 씨는 2021년 직장에서 은퇴했다. 건강도 악화됐다. 가장 큰 문제는 동영이도 센터를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센터 정원은 정해져 있고 아이를 맡기려는 사람은 많은데, 동영이는 12년째 센터를 이용하는 중이었다.

센터 활동을 하며 스웨덴 견학을 간 적 있다. 그곳에서 발달장애인 일과를 살펴봤더니,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벨을 울리면 활동지원사가 온다. 그 활동지원사는 아침 식사를 보조하고 장애인을 직장까지 데려다준다. 직장에는 장애인 업무를 보조하는 지원사가 2명 있다. 식사할 때 보조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퇴근 후 여가 생활을 보조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그곳에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일과 주거를 갖고 생활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선 씨는 인생을 포기하고 아들 돌보는 일에만 전념해야 했다. 한국이 스웨덴에서 기선 씨가 봤던 복지체계를 갖추기란 요원해 보였다. 체계 없는 황무지에서 오로지 돌봄을 전담하는 삶을, 비장애인인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들은 갈 곳이 없다. 맡을 사람도 없다.

그래서 기선 씨는 장애인 부모들의 유구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세상 떠나기 전에 동영이 먼저 데려 가십시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 우두커니 식탁에 앉은 기선 씨 머리 위로 아들 동영이가 어린 시절 처음 조립한 성화 퍼즐이 걸려 있다. 액자에 넣어 보관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빛이 바랬다.

▲홍기선 씨 자택 거실에 아들이 어린 시절 처음 조립한 퍼즐 성화가 걸려 있다.

“우리 사는 게 죄인 아닌 죄인입니다. 엄마들 마음이 비슷해요. 내 삶이 없잖아요. 그리고 남편들도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면 따뜻한 밥 차려주는 걸 원하잖아요. 그걸 왜 모르겠어요. 그래도 엄마들이 지치는 거예요. 정신적으로도. 닥치니까 하는 건데.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아이들이 30대가 되면 이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런 생각 하다 보면 또 억울한 거예요. 동영이 돌보느라 딸들에게는 신경도 못 썼다는 죄책감도 있는데, 딸들에게 다시 책임을 넘길 수도 없어요. 외국에는 복지가 잘 돼 있는 곳도 있지만, 한국이 그렇게 되겠어요?”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