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다이셀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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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회장은 멀리 보지 않고 바로 눈앞의 천막을 바라봤다. 천막 안에선 회사가 사라진 이들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멀리 본다면 이미 끝난 싸움일지라도 폐업 철회를 외쳤을 것이다. 정민욱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경주지부 다이셀 지회장은 “나에게 우선시되는 건 동료들이 다른 직장에 안정적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외국인투자기업인 다이셀코리아는 한국이 보증한 10년의 혜택을 온전히 누린 뒤 철수를 통보했다. 직원들은 항상 폐업 가능성을 염두했다. 일상화된 불안 끝에 결국 도래한 결말이었다. 다이셀은 무상으로 1만 2,000평의 부지를 사용했으며 각종 세금을 감면받았다. 2011년 영천시와 체결한 투자유치 계약서에는 ‘노사분쟁, 지역민과 분쟁 발생 시 지방자치단체는 회사 측에 협력한다’는 조항까지 포함했다. (관련기사=외투기업 다이셀코리아, 무상임대 끝나는 시점에 일방적 폐업 논란(‘22.05.11.))

폐화약을 처리하기 위해 한두 명의 인력이 공장 입구로 들어갔다. 6월 30일 공장 폐업 전까지 나머지 100여 명의 직원은 휴업 상태다. 열댓 명의 노동조합원들은 회사가 폐업을 통보한 한 달여 전부터 점심시간마다 시청 앞에서 피켓과 현수막을 든다. 그중 두세 명은 공장으로 이동해 천막을 지킨다.

▲다이셀노조 조합원들은 폐업 통보 이후 평일 오전 11시 40분부터 한 시간 가량 영천시청 앞에서 재발 방지와 고용책임 등의 요구사항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선전전을 하고 있다.

다이셀만의 일이 아니다. 다국적기업이 효율을 이유로 철수와 진입을 반복하는 글로벌 공급망 구조조정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임은정 산업연구원 연구원이 2020년 발표한 보고서 ‘외국인투자기업의 철수 결정요인과 시사점’은 국내 외투기업 철수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가 집계 및 발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연구원은 “사례를 살펴보면 저조한 경영 실적, 현지시장 점유율 감소 등의 이유로 국내에서 철수하는 기업도 있지만, 높은 경영성과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철수하는 기업도 혼재해 있는 상황”이라며 “외투기업의 철수는 관련 현지기업, 노동자 및 지역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남은 건 사람뿐이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 친구의 추천으로 입사해 노동조합 활동에 뛰어들었으며 어떤 이는 사내 연애를 통해 결혼에 골인했다. 회사에 다닌 지 10년 된 어떤 이는 창립 초기 한두 번 진행한 체육대회를 떠올렸다. 천막 안에는 동료들이 가져다 놓은 토마토, 김밥 같은 주전부리가 가득했다. 회사 안에 정수기 물통을 배달한 트럭 기사는 천막 앞에도 물통 세 개를 내려놓았다.

나는 투쟁이란 단어가 낯선 세대다. 하지만 연대와 책임은 여러 방식으로 배웠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책임을 말하는 정 지회장의 태도였다. 정 지회장은 “영천시가 자랑하며 세금으로 모셔 온 기업인 만큼 철수 이후 남은 노동자를 책임져야 한다. 조합원이 다른 곳에 취업해서 또다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도 있으니, 마지막까지 이 투쟁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지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임은 지회장에게만 있지 않다. 자본에 유리한 해석을 멈추고 책임을 말해야 한다. 국회는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지자체는 철수로 인해 피해를 받게 될 이들을 위한 교육 및 취업 알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 지회장은 “다이셀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 제기한 재판에서 일본 본사와 다른 회사라고 강조하더니, 철수할 땐 ‘본사의 결정’이라 말한다. 노조도 지자체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었다. 이미 결정된 폐업을 막을 수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영천시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재취업 보장과 함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