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의 4.9통일열사 추모일지, 이재문 흉상 제막식에 부쳐 /박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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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봄, IMF 잿빛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꿈 많고 열정 가득한 98학번 새내기. 핵인싸가 되고 싶었을까? 1학년 과대표, 그게 뭐라고 경선 끝에 당선되어 처음 맡은 과업은 학부제 반대 투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들의 엄포와 호들갑에 속아 넘어간 것 같지만 ‘동기사랑 나라사랑’이 절대 신념이었던 갓 입학한 신입생에게 우리 과가 없어지고, 과방이 없어진다는 얘기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이재문, 여정남 열사 걸개그림

때는 4월 학생총회 날, 우리 과 신입생 50명 중 40여 명이 과깃발을 들고 과가를 부르며 위풍당당 민주광장에 입장했다. 우리 과를 지키겠다는 결연에 찬 눈빛은 이글거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다는 학생총회는 하지 않고 대강당 입구에는 처음 보는 인물들의 걸개그림이 장엄하게 걸려있다. 온통 ‘통일열사’ 문구로 도배된 현수막으로 민주광장 주변은 일렁거렸고, 대강당 계단 위에는 마이크를 잡고 학우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었다. 1부 추모제, 2부 학생총회로 이어진 다소 배신감 들었던 그날의 집회, 그것이 4.9통일열사 이재문, 여정남 선배님과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비록 학생총회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학부제를 막아냈던 승리의 감동과 이재문, 여정남 열사를 처음 만난 그날의 전율만큼은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학생회실이나 과방에 앉아 있을 때면 이재문, 여정남, 추모비 얘기는 끊이지 않았다. 선배들의 “라떼는 말이야” 추모비 무용담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일 때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진격의 거인 같은 포크레인을 앞세워 추모비를 탈취하려는 경찰의 침탈에 맞서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밤새 싸웠던 이야기, 누구는 많이 다쳤고 누구는 수배당하고 구속당했던 이야기, 전설의 순찰차 탈취사건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4.9통일열사 추모비 영웅담을 깔깔대며 들었다. 신나게 말하는 와중에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도 엿보였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돌덩이 그게 뭐라고 목숨 걸고, 인생을 걸고 싸워야만 했을까? 하지만 더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은 하나의 비석에 불과한 추모비, 그게 뭐라고 추모조차 못하게 이적표현물 운운하며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정권과 경찰의 행태는 도무지 용납 불가였다. 95, 96년 선배들의 헌신적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6년 정권과 경찰은 결국 추모비를 탈취했다. 경북대에는 상처뿐인 영광과 추모비 터만 쓸쓸히 남았다.

▲경북대 민주광장에 열린 이재문, 여정남 열사 추모제

그리고 2000년 학우들의 모금을 통한 추모비 재건립 운동을 진행했다. 어느새 선배가 된 나도 건물 로비와 강의실에서, 식당 앞에서 모금함을 들고 추모비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그 정성과 노력이 모여 2000년 5월 18일 민주광장에 추모비가 다시 세워졌다. 탄압과 침탈의 걱정이 왜 없었겠냐만 정권교체 이후 바뀐 남북정세와 학우들의 모금을 통해 진행한 추모비를 감히 어떻게 하겠냐는 호기가 한몫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어렵사리 다시 세워진 추모비를 우리는 시시때때로 찾아갔다. 집회가 끝나고 민주광장 뒤편에 추모비 앞에서 함께 묵념하며 마무리했고, 삶이 부대끼고 지칠 때, 한없이 작아질 때 추모비 앞에 서서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맹세하고 반성하며 열사 앞에 당당한 후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광장과 추모비는 그 시절 우리들의 성지였다.

캠퍼스에도 재개발이 유행하고, 곳곳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민주광장은 사라지고 우리들의 성지도 사라졌다. 그동안 여정남 열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법적 명예회복을 받았다. 2010년에는 열사의 이름을 딴 ‘여정남공원’이 세워지고 추모비도 여정남공원으로 옮겼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자리에 나는 졸업생으로 함께 했다. 하지만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활동 등으로 여전히 법적 명예회복을 받지 못한 이재문 열사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알게 모르게 배제됐다. 보수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탄압과 색깔론의 빌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자기검열이 이재문 열사를 더 외롭게 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나의 고유명사로 불렸던 ’이재문여정남‘이 이제는 명예회복을 한 ’여정남‘과 여전히 금기어로 남은 ’이재문‘으로 분리된 것이다. 여정남공원이 조성되고 훨씬 편하고 친숙한 공간으로 자리 잡아도 민주광장의 감동과 추억을 대신할 수 없듯, 매년 4월 추모제를 지내도 그 시절 ’이재문여정남‘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못내 아쉽고 씁쓸했다.

그리고 2021년 11월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에서 이재문 열사 40주기를 맞아 남민전동지 합동추모제를 통해 공식적인 최초 추모제를 진행했다. 비로소 이재문 열사를 제대로 추모하고 기리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꽤 먼 길을 오가는데 오랜만에 고향어른을 찾아뵙는 것 같은 죄송함과 설렘이 교차했다. 올봄에는 여정남, 이재형 선배님 흉상이 세워진 공간에 이재문 열사 흉상을 설치하고 이재문, 여정남, 이재형 선배님 흉상을 한곳에 모시게 되었다. 추모비를 세우고, 지키며, 공원을 만들면서 때로는 희생을 감내하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수많은 피땀눈물이 만든 결실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11월 19일(토) 여정남공원에서 유가족과 원로선생님, 동문들과 함께 제막식을 진행한다. 경북대 학생운동 역사가 열사정신을 오롯이 계승했음을, 그렇게 함께 싸우고 지켜왔음을 보여주고 확인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대학 시절

따뜻한 4월 봄날, 풍성한 11월 가을날 여정남공원에 한 번 들러보면 좋겠다. 그곳에 있는 추모비에는 수많은 청춘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 옛날 걸개그림이 이제는 흉상으로 열사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곳에서 “사월의 맑은 하늘 아래 우리의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자”는 구호도 외쳐보고,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노래도 불러보고, 추모비 앞에 서서 김남주 시인의 ‘전사1’을 한번 찾아 읽어보면 어떤가. 그러다 보면 선배열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추모비 지키기 투쟁하며 청춘을 불태웠던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4.9통일열사 이재문, 여정남, 이재형 선배님을 추앙하는 여전한 방식이다. 언젠가는 이재문 열사도 법적 명예회복을 반드시 하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4.9통일열사의 명예가 곧 나의, 우리의 명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