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민을 후원합니다] 뉴스민과 나의 기억 / 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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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서울에서 근무하다 대구로 발령받아 어리버리 일을 시작했다. 대구로 발령이 난다하니, 동료들이 먼저 걱정을 더 했다. 보수적인 문화 때문에 인권 정책에 대한 이해가 낮지 않을까, 홍보 협력 분야에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데, 더 고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주변의 우려에도 대구든 어디든, 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고 정책이 지역을 가려가며 이뤄지겠느냐는 순진한 마음에 대구에 짐을 풀었다.

그들의 걱정이 기우였다면 좋았겠지만, 생각보다 벽은 높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단체인 줄 아는 사람, 국민권익위원회인 줄 알고 업무를 진행하려는 사람, 대구에 그런 게 있었냐며 반문하는 사람까지. 국가인권위가 대구에서 하는 일이 적지 않았건만, 이를 알려줄 통로가 급선무였다. 그때 희생양이라면 희생양, 은인이라면 은인이 된 이가 천용길 당시 뉴스민 편집국장이다.

사실 처음 뉴스민이라는 매체를 ‘서울TK’가 접했을 때는 말 그대로 ‘듣보잡’인 언론인가 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내가 지역의 듣보잡 홍보담당자였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대구·경북이라는 지역에서 공유하고 있는 영역들, 그 영역 안에서 사람들과 도시를 사랑하며 생산해내는 기사들, 거기서 파생되는 정책들까지. 매우 매력적인 사람들이고, 언론이었다. 그들은 성주에서도, 동인동 재개발 현장에서도, 영남대병원에서도 ‘인권’이 필요한 곳이라 우리가 다다르면, 이미 먼저 와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 대구는 신천지며, ‘대구봉쇄’며 흉흉하기 그지없고, 긴박하기 그지없던 시기였다. 당시 대구시는 코로나19 환자 전문 병상을 확보하느라 대구의료원 기존 환자를 전원조치하며, 소개하는 일을 했다. 그때 한 시민의 다급한 전화가 인권위로 걸려 왔다. 어머니가 호흡기를 떼면 돌아가시는데, 대구의료원 이상급 병원에서만 치료를 이어갈 수 있는데 그냥 알아서 나가라고만 한다고 호소했다. 간절한 전화는 인권위로 계속 이어졌다.

인권위에서도 긴급구제 절차 같은 공식적인 프로세스가 있지만, 그 역시 절차는 필요했고 이렇게 다급한 순간에는 아쉽기만 한 제도일 뿐이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뉴스민 뿐이었다. 걱정하는 시민에게 뉴스민에 제보를 해보라고 안내했고, 다행히 당시 대구시장 브리핑 현장에 있던 뉴스민 기자들이 이를 시에 전달하고 대구시가 해결책을 내놓기도 하는 일이 있었다. 어찌보면 작은 순간일 수도 있었지만, 사람을 위해 지역을 위해 관과 언론이 같이 해 나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작은 사례가 되지 않을까 혼자 자부하는 기억이다.

다시 서울에 와서 보니 대구는 이름만 광역시인 지역 도시 중 하나일 뿐이다. 지역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고, 그들의 존엄한 삶을 위한 수많은 정책이 필요할 텐데 그 목소리를 내주는 것은 중앙의 거대한 언론사로는 부족하다. 아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뉴스민이어야지 가능한 많은 일들이 도처에 아직 남아 있다. 지금 이대로 뉴스민이 역할을 마무리하기에는 우리 지역이 가야 할 많은 날과 일이 남았다. 뉴스민 힘내라. 우리가 사랑하는, 나의, 여러분의 뉴스민을 위하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며 뉴스민에 칼럼 쓰는,
박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