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경의 인권 돋보기]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연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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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3조.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아는 친구의 큰아버지의 친구의 사돈 누구는 원래 명석하여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잘 갔는데, 취직 시험 마다 면접 때 탈락했다더라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 이의 작은할아버지가 전쟁 때 월북을 했다고 합니다.

취업만 제한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월북자 가족 연좌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판단한 내용을 살펴보면, 수많은 가족들이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국가는 월북 인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제한하고, 더 나아가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사생활을 수시로 감시하고 간섭하였으며, 수상한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경우 불법 납치나 감금 그리고 고문까지 자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연좌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진=국가인권위원회)

연좌제란, 범죄자와 범죄자의 가족 등 특정한 사람들에게 범죄로 인한 책임을 연대적으로 부과하는 제도입니다. 연좌제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권리 침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가지는 기본권을 정당한 이유 없이 혹은 법적 근거 없이 침해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지만, 그 법적 근거로 ‘연좌제’라는 악법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법적 안정성을 고려하면 연좌제는 ‘그래, 그런 게 있어야 범죄도 줄고, 식구들 생각해서라도 나쁜 짓 안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대 전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삼족, 구족을 멸하는 멸문지화의 형이 있습니다. 사극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거리입니다.

반역을 꾀한자이니 그 가족 삼족, 즉 당사자의 부모와 그 형제, 당사자와 그 형제, 당사자의 자녀와 자녀들의 모든 형제를 다 벌해버리는 거죠. 이렇게 되면 그 어느 누구도 ‘나 하나만 다치면 되니까 용감하게(?)’라는 마음으로 반역을 꾀할 수 없게 되고, 왕권 강화에 굉장한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습니다. 왕권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나,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우리나라에선 폐지됐습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정변 후 7월에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왕권 유지를 위한 역할을 잘해주었던 법이니 만큼, 현대 대한민국에서 이 법이 부활된 것 역시 정권유지와 관련 있었습니다. 군사정변으로 불안하게 시작한 정권이었기에 반대를 이야기하거나 정권에 도전하는 자들을 국가보안법이든, 질서유지법이든 처벌을 한 뒤에 그 가족까지 ‘연좌제’로 옭아매고 여러 국민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한 목적은 생각보다 잘 먹혔습니다. 민주화 투쟁이 극심한 시절에 부모들이 자식을 가장 쉽게 설득하는 방법으로 ‘니가 잡혀가면, 아버지 회사에서 쫓겨난다’ 였으니까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그 효과마저 입증되었기 때문일까요? 1980년 8차 개정 헌법 때 연좌제 금지가 헌법에 규정되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사회 구석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구성원 1명이 잘못하면, 동기라는 이유로 혹은 친하다는 이유로 단체로 처벌을 받아야 했던 학교와 군대 모습에도 연좌제는 숨어 있습니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세상 좋아졌다는 지금도 연좌제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흉악범 신상 공개 제도가 있습니다. 엄격히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닌 그 가족이 언론과 대중에게 받아야 하는 고통은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민 정서 역시, 저렇게 얼굴을 만천하에 알려야지 흉악범을 피할 수도 있고, 범죄에 상응하는 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우리 삶 속에 습관처럼 묻어 있는 ‘당연한 연좌’에 대한 편견이 은연 중에 묻어나는 것이죠.

202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수급자 및 그 가족이 장기요양요원에게 폭언, 폭행, 상해 또는 성희롱, 성폭력 행위를 하여 유죄판결이 확정된 경우 장기요양급여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공하지 아니하게 할 수 있다(제29조 제2항)’는 내용을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에 신설하고자 했습니다. 이 역시 범죄를 저지를 당사자가 아님에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서비스를 제한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결론났습니다.

연좌제가 이름을 , 얼굴을 감추고 뒤에서 숨 쉬며 우리 편견으로 정당하지 않은 제도를 정당화해버리고, 법률 입안자는 편견을 바탕으로 연좌가 숨어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법에는 ‘자기책임의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신이 행하지 않은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질 필요도 없고, 당연히 제한당할 권리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아직 우리 사회에 군데군데 숨어 있는 연좌제의 그림자를 인권의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박민경 <사람이 사는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