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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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해마다 10월의 끝자락이 오면 여기저기서 ‘잊혀진 계절’ 노래가 흘러나온다. 올해도 무심코 이 가요를 부르다가 문득 55년 전, 1968년 10월 말경 북한군 120명이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한 사건이 떠오른다. 노래 가사처럼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래 최대 안보위기였던 1968년 상황이다. 세계 각국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우리 국군은 베트남전에 5만 여명이 참전해 미군을 지원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자유화 바람이 불자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 북한은 1월 21일 미군이 경계를 맡은 연천지역으로 침투하여 청와대 인근 300m까지 습격했다. 이틀 후에는 동해 공해상에서 미군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연이어 전후방 각지로 3~5명 소규모로 사나흘이 멀다 하고 무려 320여 명이나 침투했다. 우리 사회가 더 불안하고 혼란해 지자 10월 말경 울진삼척에서 대규모로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야말로 ‘제2의 6.25전쟁’이 코앞이었다.

필자는 군 복무 중, 북한군의 대규모 도발 현장인 울진·삼척과 1.21사태 지역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여러 관계자를 만났다. 울진 전투에 참가한 윤무하(현 83세)씨는 울진으로 북한군이 10월 말경 30명이 첫 침투했을 때 경계에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북한군 특수부대원 120명을 2개월 만에 일망타진한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함을 강조했다. 더욱이 작전에 참가한 군경은 물론이고 예비군의 활약과 죽음을 무릅쓴 주민신고를 꼽았다.

1·21 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현 82세)씨도 만났다. 단독대화 중 들은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체포되어 조사받을 때 “북한군 특수부대 124군은 앞으로 대규모로 침투할 것이다. 아마도 올 10월 말경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아서 안타까웠다고 했다. 결국 10월 말경에 북한군 120명이 울진·삼척으로 침투했고 자신의 말이 입증되었지만, 당시 그 누구도 자신이 예고한 것임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1968년, 북한의 기습도발에 응징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사실 대놓고 응징 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우리 국민은 단결했다. 1·21사태 이후 4월 1일부로 220만 예비군을 창설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교련과목을 신설했다. 정부에서는 베트남전에 국군파병을 이유로 미군을 압박하여 무기도 많이 지원 받았다.

요즘 이스라엘과 하마스 무장정파 간 분쟁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스라엘 예비군이 소집에 응하고자 세계 각지에서 몰려가는 것을 본다. 어떤 첨단무기보다 더 강력한 것은 국민의 단결임을 새삼 깨닫는다. 최근 우·러 전쟁과 중동 분쟁을 분석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도발에 대비, 우리의 대응책을 내놓는다.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