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15) 에너지자립마을 프라이부르크 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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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허승규 전 녹색당 부대표는 2023년 7월 2일부터 14일까지 13일 간 독일로 생명평화기행을 다녀왔다. 독일은 녹색당이 연립정부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한국의 녹색당 정치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독일 역시 최근 극우정당 지지율이 20%를 넘기도 한, 완벽한 사회는 아니다. 2주 동안 허승규 부대표가 경험한 독일의 모습과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를 매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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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규의 독일생명평화기행] (14) 16개 정당 공존하는 녹색도시 프라이부르크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에서 [사진=생명평화아시아]

프라이부르크 도심의 제로웨이스트 가게

경북 안동에 처음 오는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을 찾는다. 어느 도시든 외부에 알려진 명소 한 두 군데는 있기 마련이다. 녹색 도시 프라이부르크를 찾는 시민들이 성지 순례 하듯이 들리는 마을이 있다. 에너지자립마을로 유명한 보봉마을이다. 기행단은 오후에 보봉마을 길잡이 관광(가이드 투어)을 하기로 했고, 오전에는 각자 자유롭게 일정을 보냈다. 나도 노면 전차인 트램을 타고 프라이부르크 도심으로 향했다. 보행자, 자전거, 트램이 조화롭게 어울려 다니는 프라이부르크 시내에선 자차 없이도 즐겁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먼저 제로웨이스트(쓰레기 없음) 가게에 들렀다.

비닐이나 플라스틱 등의 1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며, 세제 등을 소분해서 받아갈 수 있는 제로웨이스트 가게는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공유되었고, 서울 등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비슷한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종주국(?)에서 가게 방문은 남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가게 풍경이었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프라이부르크 제로웨이스트 가게 [사진=허승규]

동네 곳곳에 제로웨이스트 가게가 생긴다면, 공간이 주는 교육적인 효능과 공간을 이용하는 시민들 간의 네트워크가 발생한다. 공간을 이용하는 것으로도 생태적인 실천이 되면서, 공간을 통해 녹색시민들 간의 관계가 확장된다. 이는 또 다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속한 안동환경운동연합에선 지역의 친환경적 공간인 ‘착한 가게’를 찾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제로웨이스트 가게뿐만 아니라, 지역먹거리(로컬푸드)를 확산하는 생활협동조합 매장, 텀블러 챙겨오는 시민들에게 할인 혜택을 과하게(?) 제공하는 커피점도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서 지역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시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고, 다른 실천을 함께 도모해볼 수 있었다.

한국녹색당의 구호인 ‘동네에서 지구까지’는 지구적인 사고와 지역적인 실천을, 또는 지구적인 실천과 지역적인 사고를 연결하는 구호다. ‘동네에서 지구까지’라는 말처럼, 동네와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것은 세계와 지구를 바꾸는 아래로부터의 실천이다. 머나먼 나라에서 녹색 도시 프라이부르크를 찾아온 누군가는 다시 자기 나라와 지역으로 돌아가서 녹색 도시를 고민하고 새로운 실천을 이어간다. 내가 서있는 동네와 도시를 바꾸다 보면, 지구 반대편 동네와 도시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 대성당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지방 소도시에서 제로웨이스트 가게를 운영하는 몇몇 분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취지는 좋은데 공간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서울이나 대도시의 경우 기본적으로 인구와 수요가 많다. 인구가 적은 소도시는 ‘규모의 경제’가 어렵다. 지역의 제로웨이스트 가게가 지속가능하게 자리 잡는 것도 과제이지만, 기존의 가게나 상점 구석구석 제로웨이스트 문화가 확산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지역의 성폭력·가정폭력 상담소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상담소 자체가 없어도 되는 사회다. 동네 구석구석 제로웨이스트 문화가 확산되어,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지역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며 가게를 나섰다. 인근 프라이부르크 대성당 가는 길에 기후위기 관련 포스터를 발견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녹색당 부대표에게 ‘기후(Klima)’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2023년 9월 23일, 한국에선 대규모 기후정의행진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국경을 넘어선 기후위기 연대에 감동을 하며, 더 열심히 녹색정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으로 1200년경 공사를 시작해서 1513년에 완공된 유서 깊은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에 들렸다. 경건한 종교시설에 오니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틀이 지나면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2주간의 독일생명평화기행도 서서히 끝이 난다. 잠시 지난 시간들을 회고하면서 마음을 챙겨본다. 그래. 아직 기행은 끝나지 않았다. 무려 ‘이틀’이나 남았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마음을 챙겨서 성당을 나왔다.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Vauban village)에 가다

자유시간을 보낸 기행단원들은 보봉마을에 모여들었다. 한국에서 수차례 언론을 통해서 소개된 ‘보봉마을’은 프라이부르크의 중심부 남쪽 방향에 위치하며, 과거 프랑스군의 기지로 활용되었던 지역이다. 1992년~1995년, 독일 통일 이후 프랑스군과 나머지 연합군이 철군하면서 보봉마을 도시 개발이 논의되었다.

이에 시민자치모임인 ‘보봉포럼’이 결성되어, 교통, 에너지. 주거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녹색전환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봉포럼’은 이후 ‘보봉시민자치조합’으로 전환되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왔다. 이처럼 보봉의 주민들과 전문가, 의회와 행정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너지자립마을을 함께 만들어왔다. 기행단은 친절한 가이드님의 설명과 함께 친환경에너지주택인 패시브하우스와 솔라하우스, 상업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솔라십 등의 에너지전환 사례를 직접 살펴보았다.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 [사진=생명평화아시아]

보봉마을의 대부분 주택은 ‘패시브하우스(passive house)’다. ‘패시브하우스’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한 건축물이다. 직역하면 ‘수동적인 집’이란 뜻이다. 친환경에너지주택을 ‘수동적인 집’이라 표현한다고? 보통의 집은 태양열 흡수 장치 등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끌어 쓴다. 능동적으로 에너지를 끌어 쓴다는 뜻에서 ‘액티브 하우스(active house)’라고 한다.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패시브 하우스’가 나왔다. 패시브 하우스는 단열을 통해 건물 내부의 열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차단한다. 그래서 화석연료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실내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2002년 완공된 솔라 하우스(solar house)도 주목을 받았다. 태양광 연립주택인 솔라 하우스는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집열판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고 판매한다. 가정에서 쓰고 남은 전기는 판매할 수 있었으며, 주민들의 경제적 이익에 보탬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유인은 주민들의 에너지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자차 없이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보봉마을

보봉마을의 집집마다 태양광 패널과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대부분 두꺼운 벽과 3중창 등으로 주택 단열이 잘 되게 집을 지었으며, 열 순환이 잘 되어 집안의 열을 재활용할 수 있다. 가이드가 말하길, 주택 외벽에 나무를 식재하니 여름에는 햇볕을 가려서 시원하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서 햇볕을 가리지 않아서 따뜻하고, 봄에는 경관상 좋다고 했다.

한편 베란다에도 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는데 설치 비용 중 절반 정도를 관에서 지원받을 수 있으며, 태양광으로도 전기 감당이 안 되면 목재 펠릿을 활용한다고 했다. 현재 보봉마을에는 5,000명에서 5,5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마을 에너지 자립률은 100% 이상이며 독일 전역에서도 보봉마을이 가장 급진적이라고 했다. 신축 주택도 있었지만 100년 전 주택을 리모델링한 곳이 많다고 한다. 원숙한 가이드님의 설명에서, 보봉마을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한편 마을 주민들의 18~19% 정도가 차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은 물론 프라이부르크에서도 압도적으로 낮은 수치다. 마을 곳곳에 ‘카셰어링(공유자동차)’ 용도의 자동차와 자동차를 충전할 수 있는 전기충전소가 있었다. 도로 폭은 대체로 좁았으며, 보행자 친화적인 환경이었다. 보봉마을에는 개인 주차장이 없으며 주택 단지 입구와 외곽에 공동주차장이 있다. 마을 단지 곳곳에 생태적인 놀이 공간이 있었고,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놀 수가 있었다. 자차 없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노면전차와 자전거, 카셰어링과 같은 다양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기에 주민들은 굳이 자차를 더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동에서 정치를 하다보면 동네 곳곳에서 접하는 민원이 있다. 바로 주차난 해소다. 나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안동의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차가 2대씩 있진 않았다. 2000년대 들어와서 집집마다 자차 소유가 늘었고, 아파트 및 동네의 주차공간은 늘어난 수요를 단시간 내에 감당하기 어려웠다. 선거철마다 동네 곳곳에 주차장 증설 요구가 있지만 모든 동네마다 신설 주차장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공공교통이 불편하니 자차 소유가 증가하고, 자차 소유와 이용이 증가하면서 주차난도 심화된다. 주차장 증설에 예산이 들어갈수록 공공교통에 들어갈 예산도 줄어든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기후위기 시대, 전 세계적으로 자차 수송분담률을 낮추려는 추세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차 없이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도시가 된다면 주차난 문제에도 보탬이 된다. 프라이부르크 인구는 23만, 면적은 153.04km²이다. 안동시 인구는 15만 3천명, 면적은 1,522.21㎢이다. 프라이부르크보다 인구는 적고, 면적이 넓은 안동시에서 주차난이 웬 말인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도 보봉마을처럼 에너지자립이 실현되고, 자차 없이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동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귀국해서 해야 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에너지자립마을 보봉마을 [사진=생명평화아시아]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변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글에서, 책에서, 영상에서 봤던 보봉마을을 실제로 둘러보니, 내가 사는 한국에서, 지역에서도 충분히 보봉마을처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봉마을에 마술은 없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만들어온 시민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시민과 함께한 의회와 행정이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정치가 뒷받침했다. 변화는 실제 생활에서 구현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보완되어 왔다. 짧은 투어만으론 보이지 않는 노력과 시간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변화는 반대로 쉽게 후퇴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장기적인 변화를,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4개월 정도 남았다.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에 매몰된 정치세력들의 이합집산이 난무하다. 특정한 시기에 적합한 정치 전략은 필요하다. 다만 총선 이후의 기나긴 정치 일정을 내다보고, 지금의 정치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 계속 되물어야 한다. 거대양당보다 유능하고 깨끗한 대안정치세력이 되겠다고 수많은 이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2024년 총선은 다를 수 있을까.

녹색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단기적으로 대안적인 녹색정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이들과 선거연합정당을 통해 반(反)녹색 기득권 정치에 맞서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2026지방선거와 2027대통령선거, 2028총선까지 내다보며 녹색정치세력을 결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번 총선을 통해 차기 지방선거에서 지역의 생태적인 전환을 내걸고, 대안적인 지역소멸 담론을 펼칠 이들을 모아내자.

이번 총선을 통해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생태국가와 녹색헌법을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엮어내자. 2012년, 한국의 녹색정치세력을 모아 대안정치세력이 되고자 녹색당이 탄생했다. 창당 정신을 되새기며 내년 총선과 총선 이후를 준비하자. 변화는 오래 걸리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변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난 10년으로 부족했으면, 10년 더 노력하자. 10년 더 노력해서 녹색전환의 21세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자. 보봉의 주민들이 보봉마을을 에너지자립 마을로 만들었듯이, 녹색당이 한국 정치를 녹색 빛깔로 물들일 수 있도록 다짐하며 보봉마을 탐방을 마쳤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