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지식인의 죄 짓지 않는 삶 / 채형복

11:21

지난 4일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박형준 교수가 국민의힘 당내 경선에서 부산시장 보궐선거 최종후보로 확정되었다. 현직 교수가 관료나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박 교수가 예비후보로 확정된 이튿날 동아대 민교협, 부울경 민교협, 포럼지식공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전례 없이 그를 ‘폴리페서’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지식인 또는 학자의 사회참여를 앙가주망이라고 한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철학자들은 앙가주망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사회에서 실천했다. 유럽에서 앙가주망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실천적 지식인은 존경의 대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모두가 행복하다면 굳이 앙가주망을 들먹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수많은 사람이 부당한 정치와 자본 권력에 의해 형극의 고통을 받고 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만일 지식인이 이에 저항하지 않고 진실을 외면한 채 그늘로 숨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퇴보하며, 질곡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사람들은 희망 없이 절망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한 지식인의 실천적 삶의 방식이자 태도인 앙가주망이 절실한 이유이다.

이와 달리 폴리페서는 대학에 자리를 두고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학자를 말한다. 대학 교수는 한 분야의 특화된 전문지식을 가진 지식인이다. 교수도 정치 활동과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학교 밖 사회에서 그가 가진 역량을 발휘한다고 하여 무어라 탓할 일은 아니다. 사회참여 혹은 봉사는 교육·연구와 함께 소위 ‘교수의 3대 의무’의 하나이니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로 다시금 폴리페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을까. 그 논란의 핵심은 교수가 지켜야 할 ‘고유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에 있다.

▲지난 4일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박형준 교수가 국민의힘 당내 경선에서 부산시장 보궐선거 최종후보로 확정되었다. 현직 교수가 관료나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박 교수가 예비후보로 확정된 이튿날 동아대 민교협, 부울경 민교협, 포럼지식공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전례 없이 그를 ‘폴리페서’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교수는 기본적으로 대학에 소속된 교육자이자 학술연구자이다.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교육자가 수시로 대학을 떠나 정치 권력판에 기웃대면 그 피해는 오롯이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학술연구도 마찬가지다. 교수는 시민이 낸 세금과 학생들이 낸 등록금에서 월급과 연구비를 받고 생활한다. 그럼에도 교수가 학술연구에 집중하기보다는 바깥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교수는 모름지기 교육과 학술연구라는 본분을 지키면서 현실 참여라는 사회봉사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폴리페서란 교육과 연구라는 교수 본연의 사명을 도외시하고, 권력 추구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두는 부류의 교수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인의(仁義)와 예(禮)의 현실적 실천 여부를 기준으로 군자를 ‘선비, 광자, 견자, 향원’이라는 네 부류로 나누어 구분한다. 선비는 중도(中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공자와 맹자가 이상형으로 삼는 군자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비를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공자도 <논어> 자로편에서 “중도를 행할 수 있는(中行) 선비와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나 견자와 더불어 함께 할 것이다”고 말한다. <맹자> 진심하편에서 맹자는 광자와 견자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지향하는 바가 너무 커서 입버릇처럼 옛날 사람은 어찌어찌 했다고 말하지만 그 행동을 살펴보면, 행동이 뜻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이러한 광자도 얻지 못하면 더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선비와 함께 하고자 했는데, 이들이 견자이다. 즉 견자는 광자 다음이다.”

선비를 만나기가 어려운 현실이니 광자와 견자라도 내세워 현실을 개혁하자는 것이 공자와 맹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향원(鄕原)’이다. 향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동네(鄕) 사람들이 모두 친근하고 후덕한 사람(愿)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향원은 “비난하려고 해도 꼬집을 데가 없고, 공격하려고 해도 약점을 찾을 수 없”는 군자의 유형이다.

우리 사회도 어딜 가든 예의 바르고 점잖다고 칭찬 듣는 이런 사람을 선호한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공자는 향원이야말로 ‘덕의 적’이라며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는다. 겉으로 흠잡을 데 없는 모습과는 달리 향원의 본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는 ‘세상에 아양을 떠는 인간’이라는 게 비난의 핵심이다. 맹자도 그런 향원이 외려 광자와 견자를 비웃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광자를 보고) ‘어찌 이렇게 뜻만 큰가! 말하면서 실천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면서 말한 것은 돌아보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옛사람을 찾는 꼴이라니!’ 하고 비웃으며, 또 (견자를 보고) ‘왜 저렇게 혼자서만 깨끗한 척 하며 외로움을 자처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을 해야지.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라고 비웃는다.” (맹자, 진심하37)

공자와 맹자에게 향원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상에 아부하는 사람’이자 ‘유사 군자’이다. 한마디로 향원은 선비와 ‘비슷한 듯 하지만 아닌 것’, 즉 ‘사이비’에 지나지 않는다. 맹자가 말하는 군자의 네 가지 유형인 ‘선비, 광자, 견자, 향원’은 오늘날 지식인으로 불리는 대학교수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예나 지금이나 선비-지식인을 찾기는 어려우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심각한 것은, 광자와 견자마저 사라져 버린 오늘날 대학의 모습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부딪히고 저항하며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대변하겠다는 지식인이 보이지 않으니 앞날이 걱정이다. 대학에 온통 ‘점잖은’ 지식인-학자-교수-향원이 넘쳐나는 형국이니 광자와 견자가 가진 무모한 이상주의가 그리울 따름이다.

이 글을 쓰는데 불현듯 몇 해 전 후학이 던진 ‘지식인의 죄짓지 않는 삶’에 대한 질문이 생각난다.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지식인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짓는 것입니다.
– 흐르고, 또 흘러내려야 하는 데도 고여 있으면 죄짓는 겁니다.
– 부단히 고정관념의 틀을 깨트리지 못하고 그에 사로 집히면 죄짓는 겁니다.
–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면 죄짓는 겁니다.
– 눈 뜨고 있을 때나 눈 감고 있을 때, 심지어 잠잘 때조차도 깨어있지 않으면 죄짓는 겁니다.
– 세상에 속는 줄도 모르고 그 세상을 속인다고 생각하면 죄짓는 겁니다.
–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며 세 치 혀로 교언영색하면 죄짓는 겁니다.
– 지식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하고 무지하면 죄짓는 겁니다.
– 무엇보다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실천하지 않으면 죄짓는 겁니다.”

오랜만에 답글을 읽어보니 과연 스스로 세상에 죄 짓지 않는 참된 지식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한 분야의 전문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살다보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고정관념’과 ‘자만’이다. 평생 한 분야를 파고들어 공부하고 있으니 전공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지식인이 남들보다 무엇을 조금 더 아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지식으로 인해 자만심에 빠져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히는 지식인이 적지 않다. 그런 연유로 지식인은 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깨닫고 아는 바를 나는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학문의 연륜이 깊어지면 지식의 폭과 깊이도 성숙하는 법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탁월한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이 체득한 지식은 ‘과거’에 머물고 만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식과 사회현상은 부단히 변하고 있으니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들 끊임없이 다가오고 쓸려가는 새로운 무한지식을 모두 체득할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옛것을 배우고 익혀 그에 비추어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승에서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식인은 앎에 대한 호기심과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평생 학자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죽는 날까지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평소에는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지식을 추구하되 세상이 불의하고 부조리할 때는 과감히 속내를 드러내야 한다. 거대권력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잘못을 묻고 따져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학자는 세상에 아부하여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는 향원-사이비 지식인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선비가 되지 못할 바에야 적어도 광자와 견자 같은 학자로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학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올곧게 살다 다리가 부러질지언정 불의한 세상 앞에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꺾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