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촛불열전] (1) 내 이름은 임순분

“소성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소성리 부녀회장 임순분 씨

14:04

[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적막은 너른 집에서 더욱 크게 울린다. 악몽을 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을 들은 것도 같다. 항우울제와 수면제 봉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본다. 여름날 하늘 아래로, 회색빛 돌담과 야산을 둘러싼 투박한 옹벽이 답답하게 시야를 메운다.

남편이 죽고, 임순분 씨는 입이 굳었다. 원망스러웠다. 일흔도 넘기지 않고, 그렇게 빨리 가는가. 내가 밖으로 돌지 않았더라면 병이 찾아 왔을까. 원망스런 마음이 어느새 스스로를 향한 화살이 된다. 문밖을 나서기 무섭다. 앞집 할머니 얼굴이 옛날에 죽은 사람 얼굴로 변했다가 다시 시어머니 얼굴로 보인다. 눈길을 거둔다. 거울이 보인다. 그곳에는 머리도 빠지고 치아가 툭 벌어진 비쩍 마른 얼굴이 있다.

보증 때문에 가세 기울고 공장으로
배움 향한 열망은 마음속 불씨로
남편 따라 온 소성리는 새로운 세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임순분 씨 집.

소성리(성주군 초전면)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서도 몰랐다. 때 묻은 잠바에 나일론 바지를 입을 줄도 몰랐고, 손에 흙물이 들 줄은 정말로 생각 못 했다. 국민학교 시절 임순분 씨는 서울에 있는 수도여자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기대에 부풀었다. 의성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긴 치마에 굽 높은 구두가 익숙했고, 옷매무새를 잡아주는 유모도 있어 얼굴은 언제나 말끔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 재산을 탕진했다. 쌍둥이 오빠 둘은 어려운 살림에 고등학교에 갔다. 임순분 씨는 중학교 대신 대구 비산동 직조공장으로 갔다. 급작스러운 공장생활은 임순분 씨를 좌절시켰다. 배움에 대한 열망을 묻고 주야 맞교대로 베를 짜야 했다. 정신없이 견습공 생활을 하던 차, 공장 친구와 잠시 놀러간 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소성리 사람이었다. 임순분 씨에게 시골이란 어릴 적 큰 집과 유모, 굽 높은 신발이었다. 공장과 야근이 없는 곳이었다. 공장 생활에 신물이 나던 차, 20살 임순분 씨는 서둘러 결혼했다.

비산동에서 아이 둘을 낳았다. 약초 캐러 간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밤중에 들은 소식에 황망히 애들 둘 손을 잡고 소성리로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더러 시어머니가 쓰러진 자리에서 밤을 새우도록 했다. 아이들과 낯선 집을 지키자니 암흑천지가 무서웠다. 소성리는 임순분 씨가 생각했던 그 옛날 시골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때부터 실감했다. 재래식 화장실도 불편했고,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다. 상을 치른 후 대구로 돌아와서는 3개월을 혼자 살았다. 남편은 홀로 계신 시아버지를 돌보러 가서 나오지 않았다.

이혼을 결심했다. 마음먹은 참에 담판을 지으러 막차를 타고 소성리로 들어왔다. 아직 시간은 저녁 7시 30분인데 소성리 겨울밤은 칠흑이었다. 대문을 넘어서니 기척을 느낀 남편이 나왔다. 불쏘시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둑처럼 쌓았던 결심이 무너져 내렸다. 부엌에서 불 지펴 밥하는 남편 면전에 이혼 이야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그날로 25살 임순분 씨는 소성리에 눌러앉았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울퉁불퉁한 시골길과 돌부리에 자꾸 구두가 툭툭 걸렸다. 이듬해 여름이 되도록 볍씨는 어떻게 뿌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긴 치마를 찰랑대며 개울로 나가던 차.
“새댁, 새댁”
앞집 할머니다.
“네 할머니”
“참 답답데이. 새댁. 논에 한 번 나가봐라. 못자리에 피가 얼마나 많노. 그 신발 벗어 던지고 피나 뽑아라”

‘남이 뭘 신든 왜 참견일까’, 괜히 기분이 나빴다. 임순분 씨는 그해 여름 들 근처에 가지 않았다. 가을이오며 상황은 바뀌었다. 임순분 씨는 ‘대구댁’이라고 불리게 됐다. 할머니의 잔소리도 여전했다. 추수 날에는 떡도 하고 흰 쌀밥 지어 나눠 먹는 게 관례라는 할머니 말에 이제 임순분 씨는 “그래, 이게 시골 법인가보다”라며 넘기게 됐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 20여 명이 지게를 들고 와 아버님과 남편을 찾았다. 없는 걸 확인하고는 곳간을 뒤져 전날 추수한 벼를 지고 나갔다. 시아버지 빚을 그제야 알게 됐다. 사정을 듣고 보니 노름에 빠진 시아버지는 내연녀까지 있었다.

구두를 벗어 던지고 나일론 바지를 차려입었다. 집에 두 달치 양식만 남았는데 구두가 무슨 소용이랴. 품앗이에 남의 집 살림까지 했다. 임순분 씨는 농사를 썩 잘해냈다. 나름 재미있다고도 생각했다. 참외 순도 치고 사과도 따면서 셋째까지 낳았다. 그러면서 적응이 된 걸까. 갑갑하고 불편했던 소성리가 점점 마음속으로 다가왔다. 도시에 살았지만 산은 좋아했던 임순분 씨.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산을 올랐는데 코끝에 닿는 바람이 너무나도 좋았다. 가슴이 확 트이는 듯했다. 그러면서 문득 찾아온 어떤 운명적 예감. 이곳에서 살게 될 거 같아. 사랑하게 될 것 같아.

여성농민운동가들과의 조우
소성리 8부녀회 결성…변화하는 소성리
농민운동에 투신했으나
자신을 되돌아보지는 못했다

▲임순분 씨

손에 풀물이 들려던 차, 뜻하지 않던 기회가 찾아왔다. 기회였을까?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임순분 씨는 가지 않았던 길로 접어들었다. 비 오는 날. 임순분 씨는 발길 끊었던 대구로 오랜만에 다시 나왔다. 동네에 경북대를 졸업하고 4H회장도 맡았던 사람 추천으로 남산동 모처 이층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여성농민운동가들을 만나보라고 하더라. 비를 쫄딱 맞고 그 집으로 들어갔더니 안에 있던 사람이 얼른 수건으로 임 씨의 머리와 얼굴을 닦아 준다. 그는 수건을 건네며 반갑게 임 씨를 껴안았다.

“옷이 젖었네요”

방에는 그와 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일곱 명이었다. 곰살맞은 시선에 부끄럼을 느낀 임순분 씨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전국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어떤 주제로 열띠게 토론하고 있었다. 대화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수건을 건넸던 이가 수첩을 펼쳐 대화를 기록했다. 그걸 보는 순간, 임순분 씨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나도 배우고 싶어’

뜨거운 마음을 갖고 소성리로 돌아온 임순분 씨는 당장 또래 젊은 엄마 모임을 만들었다. 모인 사람은 임순분 씨 포함 8명. 왜관에서 시집온 이난숙, 대구에서 온 전정애 씨도 왔다.

“임순분 씨라고 부릅디다. 대구 가니까 글자도 적고 이름도 부릅디다. 이난숙 씨. 이렇게 부릅디다. 우리도 공부합시다. 그 사람들 초청해서 얘기도 들어봅시다”

그렇게 8부녀회를 만들었다. 빚 독촉은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임순분 씨는 8부녀회와 함께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여성의 지위, 자기 권리 찾기, 농촌 생산비 보장, 쌀값 공부. 나와 관계된 것에 대한 공부는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함께 모인 또래와 함께 산나물을 뜯어서 팔고, 닭도 키웠다. 함께 사는 생활이 공부였고 실천이었다. 똑같이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여성이 모이다 보니 부녀회 운영도 아기자기 손발이 잘 맞았다.

“장정기 씨, 박병화 씨. 우리 부끄러워하지 말고 같은 입장에서 서로 이름을 불러요. 사회도 기록도 서로 돌아가면서 봐요”

농촌에 새로운 파문이 일었다. 반발도 생겼다. 남편들이었다. 대화에 빠져 귀가 시간을 잊고 자정 무렵 돌아간 어떤 8부녀회원은 그날 남편이 문을 걸어 잠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비슷한 경험담이 들려왔다. 문제를 느낀 8부녀회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문화를 바꾸기 위해 고민했다. 대구에서 만난 농민운동가와 이야기를 하고는, 마을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남편과 이석주(현 소성리 이장) 씨를 교육 보냈다. 의구심이 들었던 이들도 농업과 인권을 공부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후 이들은 8부녀회 편을 들어줬다.

소성리에도 여느 마을처럼 부녀회가 있었다. 젊은 사람들부터 80대 노인들까지 5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한 집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활동은 딱히 없었다. 8부녀회는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광버스를 맞췄다. 온천 여행을 함께 갔다 오는 길, 8부녀회는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잘 해보겠다고 회원들을 설득했고, 조직은 젊은 층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관변단체 성격이 짙던 부녀회가 소성리에서는 말 그대로 자치조직이 됐다. 사소한 일도 회의를 통해서 결정했고, 관 동원 행사는 일절 거부했다.

1980년대는 농민운동 조직이 곳곳으로 확산됐다. 성주군에도 가톨릭농민회 소성분회가 생겼다. 임순분 씨는 이곳에서 분회 활동을 했고, 이후 결성된 성주군농민회 활동에 매진했다. 1989년 경북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 위원장, 곧이어 경북여성농민회 초대 회장. 1991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위원장, 1992~1995년 2월까지 회장직을 맡기에 이른다.

임순분 씨는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지역 회의, 총회에 뛰어다니는 사이 8부녀회는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임순분 씨가 원했으면서도 원하지 않은 삶이었다. 지금 활동이 오로지 옳은 길이고, 이렇게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투사가 된 것 같았다. 어느 현장에서도 가장 앞에 있었다.

“벼랑에 선 농촌을 구하기 위해 농산물 개방 품목의 국회 비준을 저지해야 한다. 여성 농민이 농업 생산 주체로서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1994.6.13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제 임순분 씨의 화두는 부녀회 회원, 소성리에서 벗어나 한국 농업과 여성 농민의 권리에까지 뻗쳐 나갔다. 그때 임순분 씨는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와 내 삶 어디쯤이 비어있는데, 무엇인가 잘못됐는데. 뒤를 돌아볼 수가 없다. 그러던 차, 또다시 회장 연임 제안을 받았다. 잃어버린 것들이 눈물로 흘렀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렇게 마을로 되돌아온 임순분 씨는 달라진 마을 분위기를 새삼 느꼈다. 신경을 쓰지 못했던 8부녀회가 이후에도 많이 동네를 바꿔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임순분 씨를 부녀회장으로 떠밀었다. 임순분 씨는 수락했다. 남편도 훗날 성주군농민회 회장을 맡고, 세 자식도 알아서 잘 컸다.

그렇게 집이 알아서 잘 굴러갈 거라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어느 순간, 남편의 처신 문제로 다시 집이 파산했다. 집안이 박살나니 생각지 못한 유언비어도 돌기 시작했다. 모욕적인 말들도 있었다. 젊은 시절을 다 바친 활동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남편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 임순분 씨는 그동안 했던 모든 활동을 접고 눈물로 생을 흘려보냈다. 이웃의 눈, 이웃의 입이 너무도 무서웠다. 대인기피증, 실어증, 우울증을 반복해 겪으며 임순분 씨는 대문처럼 입을 굳혔다. 몇 년을 눈물 흘렸다. 어쩌다가 농민회 회원이 방송차를 몰고 선전방송을 하면 방문을 닫고 숨어 귀를 막았다.

남편은 죄책감으로 독을 마시기도, 낭떠러지를 향해 차를 몰고 가기도 했다. 수륜면 계곡에서도 음독했다. 소식이 들렸으나 임순분 씨는 가지 않았다. 살아 돌아온 남편을 마주한 임순분 씨.

“죽으려면 농민활동가답게 죽어요. 농민대회나 가서 분신이나 하든지. 뭘 잘했다고 약 먹고 뭘 잘했다고 교통사고를 내서 죽어. 누가 잘못했는데! 나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도 못 쉬고 살고 있는데!”

새 삶을 살기로 한 걸까. 남편은 그 이후 죽는 걸 포기하고 농사에 매진했다. 임순분 씨는 남편과 서로 빚을 갚기 전까지는 죽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병원도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감기에 걸렸다. 잘 떨어지지 않는 감기가 이상했다. 보건소나 작은 병원에서는 독감이라고만 했다. 큰 병원으로 옮겼다. 엑스레이를 찍고 보니 영상의학과로 가라고 했다. 낌새가 이상했다. 딸이 달려왔다. 의사가 딸만 들어오라고 했다. 한참을 있다 보니 딸이 사색이 돼 나왔다.

“아빠, 집에 가자”
집에서 딸이 말했다.
“내가 경대병원 예약해놨어. 다시 받아보자”
“무슨 병원이야! 감기인데”

남편이 펄쩍 뛰었다. 딸이 설득해 경북대병원으로 남편을 데려갔다. 입원 3일 차, 의사는 임순분 씨에게 남편이 폐암 말기라고 했다. 의사의 야단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깐 실신했었나 보다. 그 모습을 남편에게 들켰다. 바른대로 말하라고 추궁하는 남편에게 임순분 씨는 폐암 2기라고 속였다. 남편은 6개월 뒤 사망했다. 사망 하루 전, 남편은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뭐가 미안합니까”
“모든 게 다 미안합니다.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게”
“내가 누굽니까”
“임순분. 내가 그 이름은 기억하고 갑니다”

그러면서 임순분 씨의 원망도 방향을 잃었다. 대낮에도 죽은 귀신들이 길에서 보였고, 임순분 씨는 입과 방문을 굳게 닫았다.

촛불, 임순분 씨 마음의 벽 허물다
성주군수 ‘김치싸대기’ 사건
“소성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사드 배치 장소가 결국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결정됐습니다. 국방부가 지난 주말 배치 시점을 발표하면서 장소는 어디가 될 것인지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른바 ‘치고 빠지기식’으로 여론 동향을 지켜보던 모양새였는데, 오늘(13일) 공식 발표한 겁니다. 해당 지역 민심은 들끓고 있고 배치 자체를 둘러싼 논란은 불이 붙는 상황입니다…”( <JTBC>, 7월 13일)

1년이 황망히 지나갔다. 임순분 씨에게도 망각과 적응은 찾아왔다. 약물치료를 받던 중 의사가 개를 키워볼 것을 권유했다. 동물은 싫어했지만, 말벗도 되고 의지도 할 수 있다며 권하는 의사 말을 따랐다. 개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마을에서 개를 구해다 주었다. 처음에는 개똥도 치우지 못했다. 하지만 집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순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문을 열면 잿빛 옹벽만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그 아래로 순둥이가 늘상 임순분 씨를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사드 배치 부지로 성산포대가 선정됐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방송을 보고 있자면 문득문득 옛날 활동하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기분도 들었다. 걱정은 됐으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옛날 활동가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을 이장이 된 이석주 씨는 임순분 씨 사정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이석주 씨는 사드 발표 이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임순분 씨를 구슬렸다.

“부녀회장, 사람을 만나라. 사드 집회에 나가라. 사람 만나야 부녀회장 병이 낫고 부녀회장이 산다.”

이석주 이장은 임순분 씨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다니곤 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다 오는 길, 임순분 씨가 미쳐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못해 전화를 받지 않자 이석주 이장은 동네 사람을 불러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집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자니 무섭다고 빼는 사람도 있었다. 도금연 할머니가 앞장서서 집을 뒤졌는데 찾지 못했다. 집에 오는 길, 부재중 통화가 가득한 걸 확인한 임순분 씨는 이석주 이장과 뒤늦게 통화했고, 잠시간 마을에 소동이 벌어진 일도 알았다. 그날 임순분 씨는 딸에게 전화했다.

“영주야, 마을에서 이렇게 나를 걱정해준다. 나 같은 사람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9월, 임순분 씨는 용기를 내 집회에 나갔다. 혹시나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여전히 무서웠지만, 창밖으로 나온 세상은 따뜻했다. 사람들은 임순분 씨를 살갑게 맞이했다. 마른논에 물 대는 듯 온정은 임순분 씨의 마음을 적셨다. 갈라진 틈 사이로 다시 용기가 채워졌다. 분노에 찬 마을 할머니들을 추스르고 다독이는 일, 잦은 회의에 참여하는 일, 대구로 서울로 소성리 사정을 호소하는 일. 많은 사람이 임순분 씨를 필요로 했고, 임순분 씨는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았다.

▲2016년 9월 26일 사드 배치 철회 촛불집회에서 발언하는 임순분 씨.

다시 머리띠를 둘렀다. 머리띠가 버거울 때도 있었다. 김항곤 군수를 마주할 때가 그랬다. 김항곤 군수를 개인적으로도 알던 임순분 씨는 군수가 소성리에 사드를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8월 22일 김항곤 군수가 성산포대를 제외한 제3부지 검토를 국방부에 요청했고, 결국 사드 최적지가 성산포대에서 소성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군수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가 소성리를 사드배치 최적지로 발표한 30일, 소성리 할머니 여섯 명이 마을회관에 굳은 얼굴로 모여 앉았다. 먹구름에서 비가 내려 마을회관은 어두웠지만, 할머니들은 무서워서 불도 켜지 못했다. 임길남 할머니(86)는 말했다. “나는 5남매 키워서 아들 넷 군대에 다 보냈다. 나라 지키라고 다 보냈다. 그런데 무슨 안보가 또 필요하노. 죄가 있다면 내 자식 군대에 보낸 죄. 세금 꼬박꼬박 낸 죄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살다가 묻힐 이 자리에 사드를 갖다놓는단 말이가.”

임길남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이날 새벽 한 시 김희선(85) 할머니와 통화하는 동안 눈물을 다 쏟아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삼키던 울화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린 일이 있었다. 11월 말 대가면에서 김항곤 군수가 김장 행사를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참지 못한 주민들은 첩보 영화 찍듯 김장 행사장인 대가유통센터를 찾았다. 차 안에서 임순분 씨 등 10여 명은 군수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군수가 왔다는 첩보를 받았다. 머리띠를 둘러멨다. 할머니들이 굼뜨게 내리는 사이 초전면장에게 들켰다. 젊은 부녀회원들이 우선 달려갔다. 임순분 씨는 달려가며 생각했다. 기선제압이 필요하다. 행사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군수가 어디 있든 시선을 집중시켜 기세를 잡아야 했다.

“김항곤 XXX 나와!!”

안에 있던 조력자가 손가락으로 군수 위치를 넌지시 알렸다. 쳐다보니 이미 김치 한 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군수 옆 사람이 맞았다. 군 직원들이 군수를 에워쌌다. 임순분 씨가 군수더러 욕하는 사이 군수는 비상구 쪽으로 자리를 떴다. 임순분 씨는 생각했다. ‘군수라는 작자가 한심타. 이렇게 된 마당에 이야기라도 할 것은 도망을 가나. 팔도 걷고 겉옷도 안 걸치고. 아이고…’ 들어온 입구로 돌아가는 길. 할머니 한 분의 입이 빨갛다. 고함치다가 입술이 다 갈라져 버렸다. 맞아서 피나는 줄 알았던 임순분 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진정을 위해 일주일을 다시 독한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받는 위로가 더 컸다. 광화문 촛불집회 연단에 올라 연설할 때는 수많은 촛불이 다 성주사람 편인 듯해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임순분 씨는 외쳤다.

“여기 소성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사드를 막기 위해 뛰쳐나온 세상은 아프고 기뻤다. 젊은 시절 전여농 활동에는 모든 걸 쏟았지만 스스로를 잊은 시간이었다. 임순분은 곧 전여농 의장이었다. 그 후로도 김대중 대통령 직속 농어민자문위원회 활동 등 굵직한 일들을 했지만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답다. 작은 일도 함께하고 함께 싸우는 지금이 내가 나다.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자랑스럽다. 밖으로 뛰쳐나오길 참 잘했다.

내 이름은 임순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