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역대 최고의 월드컵 결승전 /박권일

11:32

월드컵이 세계 최대 스포츠 축제인 이유는,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거의 보지 않는 나 같은 사람조차 새벽마다 TV 앞에 앉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 재미없는 월드컵이란 평도 있었지만 그래도 월드컵은 월드컵이어서, 지구에서 제일 공을 잘 차는 선수들의 신묘한 움직임에 일희일비 빠져 들어갔다. 세계 1위 독일이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이 모두 4강에 올라가지 못했다. 결승전은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대결이었다. 난 당연히 크로아티아를 응원했다. 기존 강자의 우승보다는 새로운 강자의 탄생이 더 흥분되는 법이니까.

사건은 2:1로 프랑스 팀 앞서던 후반전에 일어났다. 빠르게 공격에 나서던 크로아티아 팀 선수가 갑자기 멈춰 섰다. 관중의 환호는 기이한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간, 화면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검은 모자, 흰 셔츠, 검은 바지의 제복을 갖춰 입은 여성이 운동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흑백의 복장 때문에 마치 초원 위를 달리는 얼룩말 같았다. 그 뒤로 형광색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이 하이에나처럼 사납게 달려들고 있었다.

화면이 흔들리며 멀어지는가 싶더니 카메라는 경기장의 다른 곳을 비췄다. 캐스터가 관중 몇 명이 경기장에 난입했다고 말했다. 쯧, 또 훌리건인가. 짜증스러워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한창 크로아티아가 프랑스를 밀어붙이던 참이었다. 금방이라도 동점이 될 것 같았는데, 저 ‘무개념’ 관중 때문에 흐름이 끊기고 만 것이다. 크로아티아 선수들도 무척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관중 난입을 화면에 담지 않는다는 국제축구연맹(FIFIA) 정책에 따라, 그들은 더 이상 TV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난입자 중 하나는 프랑스 음바페 선수와 하이파이브까지 했다고 한다. 경기가 속개되며 난입 사건은 금세 잊혔다. 크로아티아는 역전하지 못했다. 4 대 2로 프랑스의 우승이었다. 비록 응원하던 팀은 졌지만(내기에 건 만원을 날렸다), 월드컵 결승전 치고 보기 드물게 골이 많이 난 경기라서 만족스러웠다. 관중 난입이 ‘옥에 티’였을 뿐.

Embed from Getty Images

몇 시간 뒤, 언론을 통해 난입 관중의 정체가 알려지게 된다. 그들은 푸시 라이엇(Pussy Riot)이었다. 기사 제목에서 그 이름을 본 순간, “아, 그랬구나!”가 튀어나왔다. 푸시 라이엇은 펑크록 밴드이자 반독재‧인권운동단체다. 2012년 푸틴을 비판했다가 감옥에 갇히며 러시아 반독재 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떠오른 이들이다. 결승전 경기가 열린 7월 15일은 옛 소비에트 저항 시인 드미트리 프리고프의 열한 번째 기일이었다. 푸시 라이엇은 러시아 경찰들의 무분별한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경찰복을 입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그들은 월드컵 결승전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고 현재 수감 중인 정치범 석방,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불법 체포 중지, 정치적 경쟁 허용 등을 요구했다.

경기장 난입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수십억 지구인이 열광하는 비싼 파티에서 소란을 피웠으니까.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비난은 딱 그 무례함 만큼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4년 동안 준비한 선수들의 꿈이 짓밟혔다”며 분기탱천하는데,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그 정도의 비난이 정당화되려면 경기장이 다이너마이트로 산산조각 나거나 최소한 경기가 중단됐어야 한다. 그런 일은 없었다. 난입으로 흐름이 좀 끊기긴 했지만, 결정적 골 장면은 아니었다. 경기는 곧 재개됐고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반면 푸시 라이엇이 전한 메시지는 무례함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숭고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국가폭력을 은폐하고 정권 홍보수단이 된 걸 비판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올림픽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의 피맺힌 절규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난 20여 년 러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은 심각하다 못해 처참했다. 푸틴 집권 후 수십여 명의 반정부 인사들이 의문사했지만 진상이 규명되기는커녕 제대로 수사조차 되지 않았다.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도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 중 하나였던 그는 체첸 분쟁과 푸틴의 음모를 파헤치며 수많은 특종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권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2006년 괴한의 총격으로 아파트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민주주의가 쓰레기통에 처박혔음에도, ‘빵’을 주고 월드컵이라는 ‘서커스’까지 선물해준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는 굳건하다. ‘군인 어머니회’, 푸시 라이엇 등 소수의 비판적 시민들만이 독재자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군부독재 시기 한국과 그야말로 판박이다.

압제와 탄압, 숱한 이들의 죽음과 고통에 비하면 경기가 잠시 중단된 건 그리 큰일도 아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저 유명한 소설(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1973)」)이 이미 간명하게 형상화한 바 있지 않은가. 단지 한 아이의 고통일지라도, 그 비참을 묵인한 채 유지되는 공동체의 번영이란 얼마나 추악한가를. 올림픽‧월드컵 같은 스포츠 이벤트는 세계의 불행과 무관하게 순수하고 정정당당한 축제가 가능하다는 신화를 유포한다. 푸시 라이엇의 퍼포먼스는 그 나른한 환상을 가차 없이 찢어발긴 실재의 난입이다. 옥에 티는커녕, 러시아 월드컵의 화룡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