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③ 명랑한 재단사, 블랙리스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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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가난한 집 장남으로 책임감이 강하고 부지런했다. 식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동생들 공부 검사할 때는 엄했지만 줄곧 다정했다. 동네에서는 텔레비전을 대신할 만한 재담꾼이라 저녁이면 뜰에 사람들이 붐볐다. 노래는 젬병이었지만, 우스운 춤과 표정으로 사람들 배꼽을 뺐고, 영화, 책, 평화시장 이야기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공장에서 녹초가 되어 밤늦게 돌아와도 그냥 자는 법 없이 어머니에게 그날 일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하였다.

1966년 추석이 끝나고 재단 보조로 들어간 한미사는 잠바집이었다. 수입은 절반 이하로 줄어 식구들한테 미안했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에 포부가 컸다. 무질서한 작업장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2층 다락을 수시로 오르내리는 시다1들을 배려해 계속 필요한 옷 부속을 풍부하게 잘라두었다. 고된 일상이었지만 시다들은 오빠 대하듯 태일을 따랐고, 태일은 넉 달 만에 재단사가 됐다. 2년을 내다본 일이 4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 시다, 미싱보조들과 함께(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전태일) [사진=전태일재단]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장 부부는 태일의 일머리와 성실함을 눈여겨보았다가 재단사 일을 맡겼다. 부부는 설 대목 후 지방으로 1주일 동안 수금을 떠나며 태일에게 가게를 맡기고 간다. 태일은 헌신적으로 일했다. 1967년 2월 23일, 본격적인 재단사 생활을 앞두고 들뜬 마음으로 ‘주인의 공을 갚고 완전한 재단사’가 되겠다고 일기장에 다짐한다.

재단사는 힘이 있었다. 미싱사는 옷을 만든 만큼 돈을 받았다. 시다는 미싱사의 성과급에서, 10~20%를 떼어 받았다. 하지만 재단사는 월급을 받으면서 미싱사한테 줄 공임2을 사업주와 결정했다. 입사와 해고를 좌우할 권력도 있었다. 사업주와 직공들 모두에게 절대적 존재였다. 태일은 양심껏 정당하게 그 사이에서 역할을 해 약한 직공들 편에 서겠다고 결심했다.

스무 살 재단사의 해고 사유
사업주는 세 사람이 할 일을 태일에게 맡겼다. 재단 보조, 시아게3 없이 태일은 3명 몫의 일을 한다. 재단사가 된 지 한 달도 안 된 3월 16일 자정 무렵 일기에는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롭다고 씌어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 동안 세 사람 몫을 하니 ‘정말 죽고 싶다’고 여러 번 휘갈겨 쓴다.

가을 무렵 일기에서는 작업장의 소음 속에서 멍하니 기계적으로 일하는 자신을 담담히 묘사한다. 무의미하고 의욕 없는 일상에 소외감을 느낀다. 일의 방관자가 되어 질서 있게 일을 ‘당하는’ 상황을 적는다. 자신이 일하는 것 같지 않은 고독감에 몸서리친다. 하지만 또 다른 메모에 다시 ‘희망’을 쓰고, ‘앞으로 가라’고 스스로 명령하며 외로움을 틀어막는다.

태일은 고된 일상 속에 자기 방식대로 동료들을 챙긴다. 부드러운 재단사에게 여공들은 고통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재단사요’ 부르며, 사흘 밤샘 근무에 잠 안 오는 주사를 맞았더니 앞이 안 보이고 손이 펴지지 않는다며 운다. 태일은 제 주머니를 털어 아픈 여공들을 병원과 약국에 데려가고 달래가며 일한다.

한 미싱사는 일하다 피를 토해 폐병 진단을 받고 해고당했다. 지켜봐야만 했다. 태일이 할 수 있는 건 들어주고 달래고 지켜보는 것뿐. 그나마 다른 재단사들은 하지 않던 일이다. 태일은 하루 일을 마친 깊은 밤, 시다들을 일찍 보내고 대신 작업장을 정리한다. 그걸 본 사장은 여러 번 경고한다. 태일은 계속 시다들을 일찍 보낸다. 사장은 해고를 통보한다. 시다들 버릇 나빠지게 한 죄, 재단사 멋대로 판단한 죄였다. 바꿔 말하면, 사람을 아낀 죄가 되겠다.

순진한 태일은 사업주 편에 설 때만 재단사의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재단사는 대부분 남성이었고, 사업주와 한편이 되어 대부분 여성인 미싱사, 시다들을 통제해야 했다. 재단사는 욕하고 때리고 잠 안 오는 주사를 놓는 ‘자리’였다. 재단사의 권력은 일 배분에 있었다. 재단사가 쉬운 일감을 몰아주면 그 팀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여공에 대한 재단사의 성폭행까지 숱하게 발생했던 배경이다.

평화시장 여공들은 한 주 168시간 중의 105시간을 이런 환경에서 일했다. 1966년 시다 신순애의 첫 월급은 700원. 짜장면 열 그릇 정도의 값이었다. 미싱사 월급은 7000~10000원. 여공들은 ‘기술이 없어서 조금 받는 거라 생각하며 기술을 배울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일하기로 마음먹’곤했다.

이들은 군사적이고 가부장적인 공장 분위기 속에 자신의 희생을 수용했다. 장시간 노동은 세상을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삶은 강자들이 정해주었다. 견디지 못한 동료들이 유흥업소로 옮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영화 ‘위로공단’ 스틸이미지

착취공장 바보들과 특성화고 교사들의 원격 토론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사회명랑화사업으로 소위 ‘부랑아, 윤락여성’을 모아 서산 간척사업에 동원해 노역을 시켰다. 그들은 원래 가난한 ‘사람’이었다. 망가진 사람들을 나라가 살려 명랑해진 게 아니다. 원래 명랑한 사람을 망가뜨려 놓고 언론에 새 삶을 얻은 것으로 홍보해 정권의 업적으로 둔갑시켰다. 많이 죽고 다쳤지만. 진실은 권력과 언론의 벽을 넘지 못했다. 비슷하게, 평화시장과 전국의 영세한 공장 노동자들은 ‘수출의 역군, 산업 전사’로 미화되었다. 속을 들여다보면 평화시장은 더도 덜도 없는 착취공장4이었다.

태일은 탐욕적인 사업주 밑에서 세 명 몫의 일을 하다가 해고됐다. 이런 착취 공장이 평화시장에만 300여 개가 있었으니 취직할 데는 많았다. 몇 군데 공장을 다니다 사장과 다투고 그만두거나 또다시 해고당한다. 해방 후 노동 운동을 경험한 아버지 전상수는 태일이 노동운동에 관심 갖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강조해 겁을 주었다. 기술을 배워 훗날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태일은 아버지의 말에서 오히려 ‘근로기준법’이라는 빛을 찾아냈다. 하루 8시간만 일하고, 1주일에 반드시 유급 휴일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끼고 살았다. 1968년 봄부터 친해진 재단사 김영문과 함께 여러 재단사를 모아 ‘바보회’를 만들었다. 동화시장 지하 은하수다방에 모여 늦은 시간까지 종업원의 눈치를 참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68년 6월, 바보회는 덕수중 근처 중국집 방에 모여 정식 창립총회를 열었다. ‘바보’회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 근로기준법이 있는 것도 모르고 당하며 살아온 바보라는 뜻이 하나. 바꾸려고 덤벼봤자 소용없으니 무모하게 저항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충고의 뜻이 하나. 어떻게 살든 ‘바보’니까 한번 부딪쳐나 보자는 취지에서 태일이 ‘바보회’를 제안하자 큰 박수로 통과됐다.

▲전태일의 일기장에는 모법업체에 대한 구상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사진=전태일재단]

태일이네 창동집에 밤늦게 몰려가 밤새도록 활동 계획을 세웠다.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도록 싸우고, 회원을 모아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며, 우선 3만 근로자의 노동실태를 설문조사하자고 했다. 나아가 독지가를 찾아 법을 지키는 모범업체를 만들자고 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렸는지 몇몇 회원이 ‘우리는 겨우 20대다, 아직 부족하니 그런 일은 좀 나중에 하자’며 친목 도모에 힘을 실었다. 태일은 우리들이 적은 나이가 아니라며 처자식 생기고 기운 빠지는 3~40대에 가서 무슨 일을 하겠냐고 반문한다. 1968년의 이 반문에 요즘 어른들은 이렇게 답했다.

2019년 5월 30일 오후 경기도의회 대회의실에는 ‘생애 첫 노동을 인간답게!’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청년 노동권익증진을 위해 3월에 출범한 경기도 노동권익센터에서 준비한 첫 토론회였다. 토론 결과를 청년 정책에 반영한다고 했다.

토론회는 진행되지 못했다. 수원이 지역구인 30대 중반의 도의원은 방법과 대상이 잘못되었고, 내용이 자극적이라며 행사 전부터 어깃장을 놓았다. 학생을 인솔해온 특성화고 교사들은 내용이 편향적이라며 항의했다.

전국특성화고졸업생 노동조합 위원장의 발표 자료에는 2017년 전주 통신사 콜센터에서 해지 방어 실적을 강요받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홍수연의 사례와 일련의 현장실습 사고를 거울삼아 노동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토론회에는 50일 전 수원 공사현장에서 추락사한 특성화고 출신 김태규 씨의 유가족도 와 있었다.

▲경기도노동권익센터에서 주최한 학생노동 토론회에서 산재사망 사고 현실을 이야기하자, 교사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사진=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페이스북 페이지]

교사들은 학생들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야지, 산업재해나 사망사고 등 부정적이고 암울한 현실을 알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내용 수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95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45분 만에 토론회장을 빠져나갔다. 한 교사는 주최 측이 제공한 생수만 먹고 간다며 동요 가사 “물만 먹고 가지요~”를 흥얼거리며 조롱했다. 다른 교사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고3 학생들이 참담한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며 핏대를 세웠다고 한다. 누가 특성화고에 오고, 취업률은 어떡할 거냐고 역정을 냈단다5. 미성숙하다‘고 판단된’ 고3들은 교사들의 명령에 집단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생애 첫 노동을 인간답게!’라는 현수막 문구는 당사자 없이 공허하게 남아 자리를 지켰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길고, 산업 재해 사망사고가 많다고, 현장실습에서 일련의 사고들이 일어났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긍정적이다. 왜냐, 그걸 아는 순간 일터에 나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표를 들었다면 학생들은 두렵기도 했겠지만, 세상을 실제로 알게 됐다는 의젓함도 얻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은 안전한 일터를 찾거나 만들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 하는 희망도 싹 텄을지 모른다. 오히려 교사들의 퇴장 명령에 학생들의 지혜와 명랑함은 더욱 어두워지지 않았을까.

그 토론회는 게다가 공식 수업이었으니 도리어 학생들의 알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교사들의 등쌀에 퇴장하면서도 ‘더 듣고 싶다’고 투덜댔단다. 교사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것이다. 제자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투표권이 없는 한국 열아홉 살의 현실이다. 1968년 전태일의 반문에 대한 오래된 대답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후
태일은 바보회 활동으로 평화시장 사업주들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된다. 노동자들은 태일을 ‘특이한 사람, 재미있는 친구, 늘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 근로조건을 말하는 사람, 여공들에게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불만을 증폭시키는 ‘위험분자’로 낙인찍는다. 태일은 그 많은 착취공장에 이제 좀처럼 취직이 되지 않는다. 날품을 팔아 인쇄한 설문지 300장 중 100장을 뿌려 겨우 30장을 걷었을 뿐이다. 분석한 통계를 들고 찾아간 근로감독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바보회 회원들도 소극적인 상황에서 태일은 ‘걷는 에너지가 모자라 애태우’고 번민한다.

공장들이 하나둘 자신을 거부하던 1969년 초순, 태일은 대구 청옥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눈 쌓인 남산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태일의 표정은 대체로 어둡다. 하지만 몸을 비틀고 손목을 꺾는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또, 눈 위에 엎드려 찍은 사진 속에서는 아직 잃지 않은 웃음을 피식 웃고 있다. 나는 태일의 그 웃음에서 세상에 지지 않는 진짜 긍정과 명랑함을 느낀다. 그 웃음마저 그해 1969년 가을 이후로는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1969년 청옥 시절 친구들과 남산에 오르던 날 (맨 왼쪽이 전태일) [사진=전태일재단]

이듬해 태일이 죽었을 때 여공 신순애가 일하던 공장 사장은 구름다리 아래 깡패가 죽어있으니 그쪽으로는 가지도 말라고 했다. 신순애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사장의 말은 당시 여공들에게 세상을 보는 거의 유일한 창문이었다. 그 창문 너머로, 토론회장에서 학생들을 철수시키는 용맹한 교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살아서는 위험분자, 죽어서는 깡패 취급을 받은 명랑한 재단사 전태일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진수성찬이 아닌 육체를 지탱할만한 검은 빵과 한 컵의 물6’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태일과 이 시대 청년들의 ‘밥’ 먹고 사는 이야기이다.

  1. 견습공. 실습생. 주로 여성 미싱사를 보조한다.
  2. 옷 한 벌 만들면 미싱사가 받는 인건비. 옷 1장당 얼마, 이렇게 부른다. 시다의 임금도 공임에 따라 결정되니 미싱사, 시다 입장에서는 공임을 미리 얼마라고 정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대개 일을 다하고 재단사와 업주가 일방적으로 공임을 정해 불만이 많았다.
  3. 옷 만들 때 마지막에 뒷손질하고 마무리하는 일, 사람.
  4. ‘착취공장’은 역사적 용어로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 아동 노동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19세기 중반 런던, 뉴욕 의류공장은 저임금 착취공장의 시작이었다. 이후 착취공장은, 산업화 초기의 후진국으로 전파되어 중국, 베트남, 방글라데시, 캄보디아로 낮은 임금을 찾아 이전한다. 70년에 전태일이 죽고 청계노조가 생겨 싸우자 다른 동네 골목으로 공장을 옮기던 한국의 의류 착취 공장들은 이제는 캄보디아까지 가 있다.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 통제 방법까지 함께 들고 갔다. 2014년 1월, 한국인이 경영하는 캄보디아 봉제 공장에서 시간외수당을 요구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시위에 군대가 개입해 다섯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정우, 〈약자를 위한 경제학〉 178쪽, 신순애의 책, 영화 〈위로공단〉에서 인용)
  5. 〈산업재해 알 필요없어, 청소년 노동권 토론회서 쫓겨난 학생들〉 외 ‘민중의 소리’ 장윤서 기자의 기사 여러 편을 전반적으로 참조함.
  6. 수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