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는 있다 ‘더 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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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슈퍼마켓 정육점. 위생복을 입은 덩치 큰 남성은 문 앞에 서 있다. 어디선가 환호가 들려오지만, 문밖에 관객은 없다. 남성은 왕년에 프로레슬링 스타 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이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노쇠한 몸으로 겨우 독립단체에서 마련한 경기를 뛰는 퇴물이다. 여전히 알아보는 옛 팬들도 많고, 젊은 레슬러들에게는 존경받는 레슬러다.

유명세와 달리 그의 삶은 경기가 끝난 뒤 피투성이가 된 몸처럼 비참하다. 랜디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트레일러의 월세를 내지 못해 낡은 차에서 새우잠을 잔다. 아내와 이혼하고 하나밖에 없는 딸 스테파니 램진스키(에반 레이첼 우드)는 가출했다. 오랜 레슬러 생활로 몸은 망가졌고, 스테로이드나 진통제 같은 약물을 남용한 탓에 경기 직후 심장 마비로 쓰러졌다. 의사는 레슬러로 계속 활동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며 경고한다. 하지만 그를 곁에서 보살펴줄 가족은 없다.

랜디가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상대는 스트립바의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다. 그는 랜디와 동병상련의 처지다. 스트립바에서 퇴물 취급을 받지만, 어린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손님들이 외면하는데도 그들을 유혹하려 애쓴다. 그런 캐시디를 찾아주는 손님은 랜디 뿐이다. 그는 랜디의 애정 공세에 흔들린다.

랜디는 가벼운 조깅에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끼고, 레슬러를 은퇴할 생각이다. 20년 만에 마련된 라이벌과 경기도 포기한다. 캐시디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그는 딸을 찾아가라며 조언한다. 딸은 아버지의 불안정한 생활을 참지 못해 그와의 연을 끊은 지 오래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고 사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마음을 열게 된다.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고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감도 생긴다.

랜디는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딸과 행복한 삶을 상상한다. 화려했던 과거 영광은 접고 비루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한물간 늙은 남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랜디는 개과천선하는 듯 보이다가 한순간의 충동을 못 이겨 과거의 잘못을 반복한다. 프로레슬링 경기를 구경하러 갔다가 벌어진 일로 딸과 관계는 다시 악화된다. 캐시디에게 고백한 사랑은 여지없이 거절당한다. 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어진 그는 여전히 나락에서 헤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한 번 더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링에 오른다.

<더 레슬러>는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작, 제65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미키 루크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주목을 받은 점은 퇴물 레슬러인 랜디와 루크의 삶이 묘하게 닮았다는 것이다. 루크는 한때 미남배우로 명성을 떨쳤지만, 폭력과 음주로 인한 잇따른 구설수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캐스팅에서 제외됐다.

1991~1995년 프로 권투선수로 활동하면서 경기 중 입은 얼굴 상처를 없애기 위해 성형수술을 했다가 부작용을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영화 내용이 루크의 인생과 닮은꼴인데다, 루크가 보인 열연 때문에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영화 중반 딸에게 흐느끼며 사과하는 랜디의 얼굴에는 폭력을 휘두르고 약물중독에 빠졌던 루크의 과거가 겹쳐져 묘한 울림을 준다.

영화에서 랜디는 화를 거의 내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젊은 시절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16㎜ 카메라로 랜디의 불안한 일상을 기록하듯 담아낸다. 노쇠한 과거 스타의 뒷모습을 유난히 많이 비춰낸다. 애잔한 대사나, 특별한 장면보다 힘없이 걷고 있는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경기에 앞서 고해성사하듯 마이크를 잡고 관중에 인사를 건네는 루크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