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9) 혁명을 마지막까지 완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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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파리와 더불어」는 1960년 2월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시적 순교를 가리킨다. 자신이 꾀한 존재의 변신은 구체적 현실과 만나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었는데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그는 변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의 포기야말로 이 작품에서 말하는 죽음일 것이다. 즉 변신의 정지, 디뎌야 할 대지가 사라지는 듯한 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을 때 대한민국은 혁명의 시간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 그림자가 없다」는 그에 대한 첫 반응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혁명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일단 시의 화자는 명료하게 눈을 가까운 곳으로 돌린다. “바늘구멍만한 예지의 저쪽에서 사는 사람들”, 즉 “나의 현실의 메트르”(「예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대신에, “메트르”여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의 적”일지 모른다는 예민함은 아직 혁명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전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여기서 “싸우고 있다”는 실제 싸우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처럼으로도 들린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은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며 “민주주의식”에 방점까지 찍기도 한다. 이런 인식은 몇 달 후 더 급진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당시, 그러니까 1960년 4월 초 상황은 김수영이 보기에 여러 가지로 유동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마저도 그에게는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림자가 없”는 절대 긍정과 믿음의 상태는, 이전 시간에 그를 지배했던 “비애”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오히려 순간적으로나마 그 “비애”가 걷힌 상태를 그는 “그림자가 없다”로 표현했다. 마지막 연의 말 더듬기는 그가 지금 얼마나 숨이 가쁘도록 벅찬 상태인지를 말해준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_「하…… 그림자가 없다」 부분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전부터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를 획책하느라 정국이 들끓기 시작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은 이승만이 자동 당선되는 것이었고,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는데 이승만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부통령 선거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자못 컸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부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있었던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경찰들은 발포로 대응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총을 맞고 죽었는데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주검이 돌에 묶인 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학생들의 2차 시위가 있었다. 3월 15일과 4월 11일 두 번의 시위로 죽은 학생은 12명이고 부상과 체포와 구금은 300명에 다다랐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전국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를 시작으로 다음 날인 4월 19일에는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4·19혁명이 촉발된 것이다.

『김수영 평전』의 저자 최하림 시인은 김수영도 그 시위에 참석했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여동생인 김수명의 증언은 다르다. 투석전이 열리고 총소리가 들리던 오후 무렵 김수영은 라디오를 들으며 분을 삭였다고 전했다.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하자 김수영은 어머니가 살고 있던 도봉동으로 왔는데, 김수명은 오빠가 그렇게 기뻐했던 모습은 없었다고 증언했다.(김응교, 「고독하지 않은 혁명은 없다」, 서울신문 2018. 1.22)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했던 4월 26일 이른 아침에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썼다. 이 작품은 한눈에 봐도 김수영이 단박에 갈겨 쓴 것이 느껴질 정도로 호흡이 가파르고 분절되지 않은 특징이 있다. 그가 얼마큼 벅찬 상태에서 썼는지 증명해주고 남는다.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보이던 망설임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이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고 도리어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는 일을 강조하던 김수영은 뒤이어 「기도―4·19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에서 혁명의 완수를 노래하고 있는데, 나는 이 작품이 김수영의 혁명시 중 가장 앞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하자고 하다가 “이번에는 우리가” 그것들이 되어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고 쓴다. 이것은 단순한 반어가 아니다. 그만큼 혁명은 사납고 추잡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그것들이 슬픔을 자아낸다는 역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슬픔이 결국 “시를 쓰는 마음”이며 “꽃을 꺾는 마음”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도―4·19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가 5월 18일의 작품이니 아마 이때까지는 혁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돌연 5월 25일에 쓴 「육법전서와 혁명」은 혁명의 흐름에 대한 불신에 휩싸여 강한 질타를 남긴다. 물론 이 작품도 혁명의 촉진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아마 허정 과도정부의 반동 기미를 눈치챘던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김수영이 바라던 것은 정권 교체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혁명이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가 구체적인 생활에 밀착된 상태에서 4·19혁명을 바라봤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

_「불법전서와 혁명」 부분

여기서 “그대들”은 당연히 「예지」의 “너의 벗들과/ 너의 이웃사람들” 즉 “현실의 메트르”이다. 혁명은 일어났는데, 너무도 합법적이다. 애초에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혁명이 “구육법전서”에 의거해 진행된다면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혁명’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부류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문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라고 했는데, 김수영이 보기에 그들은 혁명을 모를 뿐만 아니라 혁명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시대의 공기에 떠다니는 ‘혁명’을 자신의 옷자락으로 닦아서 새로이 갱신하지 못하고 그냥 갖다 쓰는 이들이다. ‘혁명’마저 새로이 혁신되어야 하건만 ‘혁명’이란 말은 넘쳐나는데 혁명은 진척되지 않는다. 현실을 과잉 표현하는 모든 것은 그냥 버캐 같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마저도 그렇다.

또 그즈음에 남긴 산문 「치유될 기세도 없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국민들이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앞으로 다가올 경제 위기를 가장 자신 있게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씩씩한 정치가들이 국회 안에는 산더미같이 와글거리고 있는데 바깥의 현실은, 비근한 예가 경북 교조(敎組)나 경방(京紡) 파업 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를 대하는 태도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과정(過政)’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고 마치 새로 설 신정부(新政府)의 서곡이나 부지 공사처럼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국무총리를 신파(新派)가 잡든 구파(舊派)가 잡든 우리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총신경은 진정한 민주 운동을 누가 어떠한 구실로 어느 정도까지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느냐의 여부에 쏠려 있다.

김수영은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의 모습에서 곧 등장할 장면 정부의 성격을 눈치챘으며, 장면 정부의 등장이란 고작 기성 정치인들이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권력 투쟁의 결과물일 뿐 국민들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교조원도 교원도 아니지만 혁명에 대한 인식 착오로 ‘과정’의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만은 그들과 동일하다”고 자괴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밀물」에서는 자신이 겪은 생활에서의 곤란을 예로 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방 벽 옆에다 서너 평가량 목간통을 들인다는데 이것도 무허가 증축이라고 트집을 잡고, 소방서, 구청, 상이군인, 지서에서 나와서 와라 가라 하고 야단들이다. 지서에 올라가서 시말서를 쓰라고 해서 시말서를 쓰고는 허가를 꼭 내야 한다기에 허가를 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허가를 내려면 비용이 모두 2만 5000환가량 든다고 한다. 나는 도무지 곧이 들리지가 않아서 얼마요 하고 다시 물어보았더니 역시 2만 5000환이란다. 5만 환 내외의 공사에 허가비용이 2만 5000환!

이러한 경험과 인식이 결국 「육법전서와 혁명」을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 「밀물」의 마지막에는 아름답고도 저항적인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았다가 나와 보니 서풍에 부서지는 한강물은 노상 동쪽을 향해서 반짝거리며 거슬러 올라간다. 눈의 착각이 아닌가 하고 달력을 보니 과연 음력 17일, 밀물이다. 숭어, 글거지, 잉어, 벌갱이놈들이 이 밀물을 타고 또 한참 기어 올라올 게 아닌가…….

같은 해 6월 17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도 남겼다. “말하자면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그는 여기서 시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강조점은 ‘혁명’에 있다. 뒤이어 “혁명을 방조 혹은 동조하는 시는” “상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혁명을 절대적 완전에까지 승화시키는 혹은 승화시켜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기고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의 혁명에 대한 관점을 밝히는 동시에 그 혁명과 시의 관계에 대한 단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여하튼 혁명가와 시인은 구제를 받을지 모르지만, 혁명은 없다.” 혁명이란 사건은 혁명가나 시인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해서 일어나거나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김수영은 번개처럼 알아버린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의 1957년~1959년 시기의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혁명은 주관적인 의지로 가능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