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 풀

13:12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글에서 인용한 ‘풀’은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아무래도 김수영의 시를 읽는 데 있어서 이 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영의 시적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끝맺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숱한 해석의 여지를 이 시만큼 남긴 작품도 드물기 때문이다.

1968년 6월 15일에 시인은 세상을 홀연 떠났고 이 시는 (연보에 의하면) 그 보름여 전인 5월 29일에 쓰였다. 그러니까 이 시는 김수영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연대기 상의 특징이 이 시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김수영의 적잖은 시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는 대체로 ‘난해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시가 으뜸이면 으뜸이었지 그 이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 시의 난해성 때문에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대한 해석에 매달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시를 느끼는 데 있어서 우리는 몇 가지 위험한 가설을 내세우는 모험도 감행할 필요가 있다. 시라는 것이 그리고 그 시를 작품화하는 시인의 내면이라는 것이 학문적 엄밀성이나 논리적 일관성으로 해명하는 것이 꼭 유일한 길은 아니다.

내가 이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내세우는 실마리는 김수영의 산문이다. 사실 김수영만큼 우리 시사에서 시와 산문이 긴밀하게 연결된 경우도 드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골적으로 그의 시와 산문은 서로를 되비춘다.

고인이 된 김춘수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라는 고백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김수영은 김춘수에 대해 이런 언급을 남긴 적이 있다.

“그(김춘수-인용자)는 자기의 입으로도 시는 난센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좋은 의미의 난센스는 진정한 시에는 어떤 시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춘수의 경우는 이런 본질적인 의미의 무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부터 <의미>를 포기하고 들어간다.”

이어서 김수영은 자신이 생각하는 무의미 시에 대해서 말한다. “작품이 형성 과정에서 볼 때는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충동이 강렬하게 충돌하면 충돌할수록 힘 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된다.”(「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1966년의 시」)

내가 보기에 김수영이 말한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과 <의미>를 이루지 않으려는 충동이 강렬하게 충돌”한 경우가 바로 「풀」이다. 따라서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시에 동원된 시어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도리어 심각한 난제를 불러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약간의 견강부회를 일삼는다면 김춘수의 김수영에 대한 질투는 이 비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풀」은 김수영이 도달한 김수영식의 ‘무의미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힘의 정체를 그 전에 남긴 산문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김수영의 내면에서 마치 마그마처럼 끓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솟구쳐 나온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오창은은 「혁명을 꿈꾼 시인들-김수영과 김남주」에서 이런 증언을 다뤘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김수영의 <풀>이 중국 북조(北朝) 민가(民歌)인 <칙륵가(勅勒歌)>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칙륵가>의 마지막 구절은 ”바람에 풀이 누우면 소와 양이 보이네(風吹草低見牛羊)“이다.” 「공자의 생활난」의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논어』의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에서 영향 받았다는 지적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러한 교양주의적 접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죽기 직전의 김수영이 과연 그런 교양주의의 틀에서 아직껏 벗어나오지 못했는지는 사실 의문이다. 「공자의 생활난」 이후 김수영이 겪은 현대사의 굴곡과 그것에 대한 응전을 고려하면 특히 그렇다.

나는 이 시가 시인의 단순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쓰였다고 판단한다. 이 시를 거듭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 지적한 바로 풀의 ‘역동성’이다. 예컨대, 이 시에서 풀은, ‘눕다/일어나다’와 ‘울다/웃다’의 반복적 행동 이외의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외에 동원되는 시어들은 “드디어” “다시” “먼저” “늦게” “더 빨리” 등 시간에 관계된 부사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의 명사가 있는데, 주어 “풀” 을 제외하면 “비”, “동풍”, “바람”, “발목”, “발밑” 등이다.

하지만 “비”나 “동풍”, “바람”은 사실 그 내포가 거의 같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거듭 반복되는 “바람”인데, 사실 “바람”도 “풀”의 행동들, “눕다/일어나다”와 “울다/웃다”와 관계한다.

다시 말하면 “바람”은 “풀”의 행동들의 원인이 되지만 정작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인 “바람”이 아니라 풀의 행동, 즉 동사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의 비밀이 이 ‘동사적 사건’에 있다고 본다. “바람”이 풀의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인 것은 맞지만 그 행동이 “바람”에 종속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시가 말하는 핵심이 된다.

그것을 “다시” “먼저” “더 빨리” “더 늦게” 등등의 부사들이 보여준다. 즉 풀은 “바람”에 의해 움직이지만 “바람”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풀이 능동적 존재라는 것은 “바람보다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바람보다도”의 의미를 짚어내지 못하면 이 시의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을 놓치게 된다. 이것을 읽을 수 있을 때 시가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뿜어내는 힘의 정체를 우리는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행에 나타나는 시어 “풀뿌리”는 풀의 능동적 행동들이 풀이라는 존재의 본질임을 최종적으로 강조하려는 김수영의 전략일 수도 있고 무의식일 수도 있다.

이 시가 김수영의 죽음 직전에 써진 것은 시인 김수영에게도 또 한국 현대시사에도 축복인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말하는 풀은 김수영의 시적 사유에서 꿈틀거리던 ‘민중’에 대한 탁월한 시적 형상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민중에 대한 시적 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무의식의 심연에 숨어서 언제든 그의 모더니즘을 삼키려는 다이몬이었던 것이다. 물론 김수영의 민중은 계급적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산문에서 ‘참여시’에 대한 옹호를 드러낸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떤 계기를 통해 작품화된 것일까. 시인 자신이 직접 그것을 드러낸 바 없으니 어떤 추정도 그저 짐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추정컨대, 그의 생활공간이 서강이라는 한강 가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생활에 대한 그의 성실성을 고려해 보면 시인 자신이 어느 날 바람이 부는 강변에 서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낮지 않다. 어쩌면 이 시에서 묘사된 풀의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의 흔들림을 그대로 묘사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와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가 각각 1연과 3연의 도입부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1년 전에 쓴 「꽃잎3」에서 자신의 집에 “고용을 살러 온” 열네 살 소녀 순이를 통해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에” 웃어버린 경험을 통과한 다음이었다. 단순한 경험과 사건에 무한한 진리가 숨어 있음을 그는 어쩌면 알아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 사유가 아니었으며 시적 사유는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언제든 솟아오르는 아이온의 시간과 닮은 것이기에 「꽃잎3」을 쓰고 난 1년 뒤에 우연한 경험을 통해 솟아나온 것이다.

시는 삶의 처처에 잠재되어 있지만 언제나 솟아오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작품이라는 개체적 몸을 얻기까지는 체험의 강도가 필요한 법이다. 물론 여기서 체험의 강도는 질적 강도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