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윤석열 검찰,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는가? / 손광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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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을 듣고 며칠을 꼼짝할 수 없었다. 그가 이루어낸 수많은 업적은 차치하고라도 1980년대 역사문제연구소에 집을 기증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는 집 한 칸 가지지 않으면서 어려운 이와 단체를 위해 강연비와 상금을 아낌없이 기부하고, 그 결과 6억이 넘는 부채까지 안고 있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죽음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를 더욱 충격에 빠트린 것은 성추행 피해 고소와 이를 둘러싼 날 선 논쟁이었다. 추모와 애도조차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그들의 주장 앞에 혼란스러웠고 이들의 앞선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극심한 공황장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우리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관련이 없는듯하지만 조국 사태 이후 검찰총장이 보여 온 행태 또한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을 파헤친 기개 있는 검사였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촛불정부는 성역 없는 수사를 하라며 검찰총장의 칼을 쥐어주었다. 그는 그 칼로 조국 전 법무장관을 겨누었고 유례없는 수사 인원을 동원하여 토끼몰이하듯 일가족을 사냥하였다. 며칠 전 그는 신임검사 신고식에서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 공정하게 형사법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왜 그는 김학의 성접대 사건, 나경원 자녀 및 사학 의혹, 최근의 검찰·언론 유착 및 자신의 가족을 둘러싼 의혹 등 수많은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것일까? 수사의 형평성과 과잉수사 금지 원칙에 위배되는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검찰총장의 모순된 행태와 성추행 피해자의 변호사, 그리고 애도와 추모조차 거부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닮은 모습이 있다고 보는 것은 편향적인 해석일까? 내가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과 내가 피해를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그곳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경고하였듯이 분업이 극도로 발달된 오늘의 우리는 공동체 사회에서 분리되어 개체화되었고 파편화된 일에 골몰한 나머지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검찰총장이 스스로 자신을 정무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듯이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익힌 수사 감각으로 자신이 목표한 사냥감에 대해서는 어디든 칼을 들이대지만 그 행위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지에 대하여는 무감각하다. 박원순 시장 사건의 피해자를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가 자신은 오직 고소인만 본다고 말한 것처럼, 그 역시 박원순 시장의 일생과 인격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제한된 시각으로 전체를 재단한다.

1978~1979년, 2년에 거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의에서 푸코는 신자유주의 사고가 지배하는 전 영역에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이윤 추구의 주체”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이전의 도덕적 자율성을 추방하고 경제적 가치 추구를 선으로, 정의로 규범화한다고 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는 공동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는가만 중요하므로 신자유주의를 이상으로 하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불평등이 초래된다. 이들은 손해에 민감하기 때문에 타인의 손해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돌이켜보면, 검찰개혁 집회에 그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물론 세상을 보다 공정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동시에 아마도 내가 조국처럼 당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기도 하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북한과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구성하면서 오랫동안 연습한 우리 팀의 몇몇이 제외된 적이 있다. 20~30대는 들끓었다. 역시 공정이 화두였지만 그것은 그들도 열심히 노력한 후에 마찬가지로 배제될 수도 있다는 데에서 동질의 피해 의식을 느끼는 탓이다. 이번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들도 위압이든 관습이든 동일한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느끼며 피해자에게 동질감을 갖는다. 그동안의 사회 곳곳에서 진행된 차별에 대해 그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무언가 석연찮은 것은 왜 그럴까. 나도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아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윤석열 총장과 검찰은 그들의 행위가 한국 사회를 인격이 존중되고 평등한 곳으로 한층 더 끌어올리는 동력으로 작동하는지 깊이 숙고해야 한다. 피해자와 이에 연대하는 우리 모두는 이것이 나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사회, 차별 없는 미래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보다 숭고한 정신에 기인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내재된 이기적인 속성으로 인해 종국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나의 행위가 진정으로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깊이 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