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변칙 개봉 논란에 가려진 ‘테넷’의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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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넷>이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유료 시사회를 통해 22일 공개됐다. 개봉은 26일이지만 22일과 23일 유료 시사회 형식인 프리미어 상영을 한 것이다. <테넷>은 7월 17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7월 말에 이어 8월 12일로 두 차례 개봉을 늦췄다. 배급사 워너브러더스는 한국을 비롯해 24개국에서 9월로 예정된 북미보다 앞선 26일 개봉일을 확정했다.

국내에선 <테넷>의 프리미어 상영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프리미어 상영이 사실상 개봉을 나흘이나 앞당긴 변칙이라는 비판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각 극장과 배급사에 공문을 발송해 “공식 개봉일 이전에 실시되는 유료 시사회는 공정 경쟁을 해치는 변칙 상영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프리미어 상영에 대해서는 슬기로운 영화관람 캠페인 차원의 영화관람 지원 혜택을 적용할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안내드린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여파로 관객이 급감한 영화계를 되살리기 위해 약 9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영화관 입장료 할인권을 뿌리는 영진위가 변칙 개봉을 이유로 <테넷>에 대한 할인권 지원 중단이라는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변칙 개봉 논란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충분히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영화인데 주말에 변칙 상영해 공정경쟁을 해쳤다는 이유에서다. <테넷>의 변칙 개봉에 대한 지적은 다양성 영화의 시간대를 차지해 영화시장을 교란한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하지만 영진위의 입장은 마뜩잖다. 국내 영화산업에서 개봉 전일이나 개봉 전 주말에 대규모 유료 시사회를 변칙 개봉 수단으로 활용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개봉한 <곡성>과 <부산행>, <닥터 스트레인지>, <나우 유 씨 미2>도 전국 영화관에서 대규모 유료 시사회를 열었다. 물론 논란은 일었지만 금세 사그라 들었다. 주기적으로 동일한 논란이 발생하고 있는데, 영진위는 시장 개입을 이유로 뒷짐만 지고 있다.

영진위가 국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최근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내놓은 ‘공정 신호등’ 서비스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정 신호등은 1일 단위로 산출되는 상영 기회 집중도를 색깔로 표시해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표시한 것을 말한다. 특정 영화의 상영 횟수 점유율이 40%를 넘어가면 노란색으로, 50%를 넘어가면 빨간색으로 나타난다. 특정 영화에 상영 기회가 쏠리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것인데,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테넷>은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놀란 감독은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첩보 요원들의 사투라는 단순한 이야기에 특별한 시간을 입혔다. 미래의 공격에 맞서 현재 진행 중인 과거를 바꾸는 ‘인버전’을 도입해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영화의 모든 장면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 집중해야 한다. 기억상실증으로 시간의 반복을 구현해낸 <메멘토(2000년)>, 시간에 대한 개념을 뒤흔드는 서사 구조를 보여준 <덩케르크(2017년)>, 블랙홀을 통해 시간을 뒤집은 <인터스텔라(2014년)>, 꿈속의 꿈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시간을 비틀어낸 <인셉션(2010년)>과 비교해도 <테넷>의 시간은 더 복잡하고 독창적이다. 상상력에 맞춰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고 정교하게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 실사영화를 고집하는 탓에 영화의 주요 소재인 ‘인버전’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맥스 카메라에 플레이 백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 테이크를 찍은 뒤 버튼 하나만 누르면 24프레임으로 역방향 재생을 할 수 있다. 아이맥스 카메라에 장착할 80㎜ 매크로 렌즈도 개발했다. 국제 첩보 액션물에 걸맞게 해외 로케이션 사상 역대 최대 규모인 세계 7개국에서 촬영하고, 영화 역사상 최대 규모인 초대형 야외 세트장을 건설했다. 실제로 보잉 747 비행기와 격납고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영화 초반부 오페라 하우스 테러 장면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만 3,300명이 넘는다.

이에 맞선 한국 영화는 어떤가? 눈물 짜내기 신파와 개연성 떨어지는 억지 설정 등 고질적으로 지적돼 온 문제들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할리우드 못지않은 CG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영화에 나오는 장면의 약 90%에 CG를 사용한 <신과 함께 시리즈> 이후 CG로 도배된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다. 문제는 과도한 CG만이 아니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할 장면은 명작의 것을 베껴 ‘한국형’이란 핑계를 내세워 문제의 근본적 요인을 가리고 있다.

한국영화계에 위기가 드리워진 지 오래됐지만, 영화계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게 실정이다. 지난 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 영화 다음 100년을 준비하다’ 포럼에서는 지원 부족을 탓하거나, 해외 사례를 들어 법 개정을 주로 요구했다.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는 없었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2019년)>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을 때 포스트 봉준호의 배출이 중차대한 아젠다로 떠올랐다. 하지만 제자리걸음만 할 뿐 실효성 있는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도전적인 영화의 리스크를 두려워하면서도, 자국 영화에 대한 보호만 외치고 있다.